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촛불소녀, 미술관에 나타나다

패션 큐레이터 2008. 12. 4. 21:01


 

박영균_촛불 소녀_캔버스에 유채_259×194cm_2008

 

미술은 항상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정신에 거슬러 저항하는

면모를 지켜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상처로 신음하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미술이 베풀수 있는 주술적 능력과 사회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올 여름, 지리한 인디언 섬머의 처음과 끝을

경찰들의 마구잡이 물대포와 곤봉, 주먹질을 견디며 버텨야 했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이 이전에 작성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입장을 번복했고, 이를 지적하는 네티즌들을 철저하게

반정부세력으로 프레임화시키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박영균_촛불 소녀_캔버스에 유채_259×194cm_2008

 

그들의 노력은 어느정도는 성공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은 꺼지기는 커녕, 이제 기억의 저장소, 미술관을 향해

달려갑니다. 박영균의 최근 작업은 바로 회화를 통해, 인터넷 매체에 등장하는 아이콘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민권력의 힘은 단순하게 억압과 진압만으로

꺼지기엔, 그 내면의 불꽃이 강했나 봅니다. 보수적인 미술관의 입구에

촛불소녀의 아이콘이 그려지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 속에는, 지난 날

정치적 독재권력에 맞서 유일하게 할수 있었던 저항의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고, 이를 보고 그날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부산에 위치한 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상당히 주목할 만 합니다.

 



박영균_쫘아악1_캔버스에 유채_112×300cm_2008

 

박영균은 플라스틱 인형을 이용하여 모델을 만들고

이에 기초한 그림을 그립니다. 쫘아악 시리즈는 바로 물대포 아래 쓰러지는

민초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박영균이 플라스틱으로 그림 속 모델을 만드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의지대로 언제든 형태를 변형해 만들수 있는 저 플라스틱이란

질료처럼, 언론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프레임을

언제든지 바꾸고 만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을 비웃기 위함입니다.

 

플라스틱은 언제나 열을 통해 가소성을 가집니다.

이때 플라스틱은 우리가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판타지를

가질수 있도록, 일종의 정신적 매트릭스를 만드는 그 소재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사회는 보수언론과 이에 유착된 권력기관들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서, 아픔을 잊고 살아가라며,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박영균_쫘아악2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08

 

회화로 그려진 도시의 풍경 속엔, 물대포와 최루탄을 동시에 쏘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에 놀라는 시민들의 표정을 만화의 아이콘을 이용해

표현함으로써, 그 긴박성과 의미를 팝아트적으로 풀어냅니다.

 



박영균_쫘아악3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08

 

시민권력을 짓밟고, 언제나 감금하고 유린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경찰을, 저렇게 아름다운 바비로 대체한 작가의 상상력이

우리를 씁쓸한 상처로 이끕니다. 현실을 대리하는 인간들, 인형들의 세계 속에서나

전개되어야 할 현실들이, 실제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이 상태는

비단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박영균_녹색 바탕위에 프라스틱을 머금은 프라스틱 인형_캔버스에 유채_162×161cm_2008

 

언제든 진압을 위해, 명령을 기다리는 경찰,

매트릭스의 상부에서 내려지는 지시에 따라, 언제든 힘을 과시할

준비가 되어있는 진압부대의 모습이 잘 형상화 되어 있네요.

청와대 뒷산에서 망원경으로 풍경을 살펴보는

대통령의 모습엔 평화를 상징하는

초록이 가득합니다.

 



박영균_자유를 이끄는 카우보이_캔버스에 유채_260×600cm_2007

 

레고를 이용해 만든 풍경이 보입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프랑스 혁명시절, 시민들이 사치와 호사로 가득한 궁정과

그들을 억압한 바스티유를 공격하기 위해 분기했던 그 모습을 담았습니다.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삶의 조건은 그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여전히 억압당하고 있으며, 정치논리 아닌

과거의 죄악을 감추려는 집단은 보수라는 엉터리

논리를 만들고, 권력화 하여 정의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미술은 저항해야 합니다.

 

 

외젠느 들라크루아, 시민을 이끄는 자유, 캔버스에 유채, 1870년

 

187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빠집니다. 총탄에 죽어가는 시민들의 사체를 넘어

자유를 쟁취하게 봉기한 자유의 여신, 비록 은유속 여신의 모습이지만

프랑스의 진정한 정신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든 여신의 모습은 분연합니다.

 

날로 척박해지고,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이 조직 내에

배어나도록, 뼈아픈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강부자 정권의 경제에 대한 비이성적인 접근법은 경제인의 한 사람으로써

그저 코웃음만 날 뿐입니다. 정책의 문제이기 보다, 실기를 했기 때문이라는 대통령의

발언 속에, 그저 리더로서 책임에 대한 통감보다, 다른 주변부의 힘에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기에 그것을 보며, 이 국난을

해쳐나가야 하는 우리들이 더욱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미술관에 간 촛불소녀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촛불이 우리를 녹이고, 언 가슴을 껴안아줄때, 다시 한번 돌아온

우리들의 석기시대가 마무리 되리라 생각합니다. 심장이 멈출정도로

총맞은 것처럼, 아프기만 한, 요즘입니다. 대규모 감원과 패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국민들이 빨리 일어나기를 마음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정치권력의 패착으로 인해

더욱 힘든 지금, 이를 악물고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