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살아있는 자들의 슬픔-김나리의 조각

패션 큐레이터 2008. 11. 9. 20:22

 


김나리_어느 신부-결혼_소금유, 도조_66×43×34cm_2007

 

슬픔은 두려워만 하다간

평생 메마르고 고립된 삶에서 벗어날수 없다.

오직 슬퍼하는 것만이 슬픔을 치유할 수 있다. 며칠 전 읽었던

소설가 앤 라모트의 <마음가는 대로 산다는 것은>에서 읽었던 구절이다.

 

김나리의 작품을 보는 시간

마음이 많이 아프다. 생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함께 내재되어 있는 작품 속에서, 생과 죽음이, 삶의 환희와

죽음에 대한 몰입이 양면처리된 직물의 흔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눈가의 주름이

눈에 확연히 보이기 시작하는 요즘, 여인의 흉상으로 표현한 삶의 슬픔이

푸른 균열의 틈을 타고 내 영혼의 빗장 속으로 흘러든다.



김나리_우즈베키스탄행 비행_소금유, 테라시질라타, 도조_80×63×46cm_2007


화관을 쓴 여인, 해골을 든 손

어찌보면 대조되는 두가지 이미지를 조각 속에

병존시키는 이런 테마를 우리는 서양 미술속, 바니타스 회화란

장르를 통해 배워왔다. 바니타스에서 Vanity 즉 허영과 덧없음의 의미가

나왔다. 강의 신 라돈의 딸, 다프네는 아폴로의 끊어지지 않는 구애로

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월계수로 태어난다. 어긋난 피침 모양의 잎파리

짙은 청록빛 속살, 햇살아래 노출시키며 담황색 잔꽃을 피워낸다.

비극적 사랑을 대표하는 신화적 사랑 앞에서 진저리 친다.



김나리_미친 꽃_소금유, 테라시질라타, 도조_55×43×38cm_2007

 

무표정한 조각들, 소금유를 발라 구워낸 얼굴의

표면위에 슬픔의 균열이 보인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슬픔인 요즘

슬픔을 사유하는 존재의 모습을 그렸다. 슬픔으로 인해, 생의 무늬가 각인된

화려한 영혼의 직물위에 균열이 생겼다고 슬퍼해선 안된다. 그 균열은

결국, 푸르른 틈새를 채우며 다가올 내일의 햇살을

맞아들이는 가장 미약한 근거가 될 것이므로.


김나리_어느 신부-결혼_소금유, 도조_66×43×34cm_2007_부분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의 유한성을 알기에, 무한대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음에

기뻐하며, 사는 날까지 살다가 죽어갈 운명을 기뻐하며, 금이 간 내 삶의

상처들을 기우고, 메우며, 수선해 말끔한 한 벌의 수의를 입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이 블로그를 써온지

11주년, 정확하게 일주일이 남았다.

 

어떤 이에겐 전업이 되고, 욕망을 채우는 지점이 되고

돈을 버는 매개가 된다는 이 블로그가 내겐 과연 뭘까......하고 생각해본다.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다. 중요한 것은 잃은 것의 무게에 눌려

상처에의 탐닉 하기 보단, 얻은 것이 내게 줄 생성의 힘과 믿음

희망의 무게를 다시 한번 마른 햇살아래 재어보는 일이다.

 

보여주고 싶었다. 나란 보잘것 없는 삶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내 곁에 있는 이들도, 작은 불꽃으로 언 가슴 안아

해빙의 바다로 이끌고 싶었다. 내 두번째 책은 바로 이런 화두를 안고 있다.

최근 부쩍 마음살이가  아픈건, 글을 쓰며, 내가 안아야 할 많은 아픈 가슴의 푸른 멍울이

 내게 전이되어서 일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안아낼거다. 모든 금이 간

마음을 가진 이들의 그 균열에 따스한 희망의 빛을 부어줄거다.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잘못되는 이유는,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호하고 있기 위함이다.

앤 라모트의 <마음가는대로 산다는 것> 중에서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거다.

살아있는 자의 슬픔, 그래 살아서 삶의 빚을 갚은

우리는 새벽향기를 맡으며, 생의 또 다른 차원으로, 일상의 마법 속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입성할거다. 난 싸워 이겨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