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작년 12월 MBC 는 공영방송다운 프로그램 하나를 선보였다. <북극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 3부작인데, 환경 파괴로 멸종위기에 처한 북극곰의 모습을 근접촬영하여 보여줌으로써 환경 위기에 처한 지구의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내주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1922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눅>도 퀘벡주의 허드슨 만에 살던 나눅이란 이누이트족을 다루었다.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한다. 카메라가 시대를 말하고 묘사하는 일종의 붓과 펜이 된다는 걸 상기 시켜주기 때문이다.
대학 3년 <다큐멘터리 영화론> 수업 시간에 이 <북극의 나눅>을 처음 봤다. 로버트 플래허티가 연출한 이 작품은 1920년대에 촬영된 작품이라고 보기엔, 밀도깊고 생생한 묘사로 이누이트 족의 삶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준 작품이다.
그당시 플레허티가 미지의 원시사회와 격리된 북극을 카메라에 담은 의도는, 오늘날의 영화제작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생존을 위해 척벅한 북극의 자연환경과 싸우는 에스키모인들의 특이한 생활모습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고픈 충동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단 이번 MBC의 <북극의 눈물>과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인간의 투쟁을 다룬 반면, 후자는 자연 파괴 속에 생존을 건 투쟁을 하는 동물들을 주로 담았다.
플레허티는 다큐멘터리를 "발견과 폭로의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일종의 탐사다" 라고 정의하면서 다큐멘터리가 가진 장르적 장점들을 그대로 토해냈다. 원래 다큐멘터리(documentary)는 라틴어(docere)에서 나온 것인데, 그 뜻은 교육한다, 훈계한다란 의미를 갖는다.
다큐멘터리 제작에만 보통 극 영화와는 수준이 다르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공영방송과 같은 사회적 책무를 수행해야할 기관에선 이런 다큐멘터리 제작을 내적인 책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점에서 <북극의 눈물>을 제작한 MBC의 결정이 고맙다.
지구의 환경오염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엔 인류의 윤리적 소비 수준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명박 대통령을 세계 대통령으로 세운다면 40년 정도의 세월을 뒤로 돌리는 건 문제도 아닐텐데) 북극의 눈물을 본 시청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왜 이전 바다 코끼리를 사냥하던 이들이 어부로 전업을 하고, 바다 코끼리는 얼음이 녹아 쉴 자리가 없게 되는지, 왜 곰의 사냥감이 자꾸 줄어드는 지 말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지금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현실이 왜 우리 자신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문제다.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시간관이 도전을 받는 것도 동일한 이유다. 알파와 오메가에만 젖어있다 보니, 아름다운 지구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의 생존을 담보하며 연결된 존재임을 자꾸 망각한다. 여기엔 여전히 발전을 위해 지구를 파헤치고 난개발하는 인간 중심주의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더 슬픈건, 이런 개발논리를 윤리적으로 보장해주는 집단이 바로 기독교 세력이란 데 있다.
변대용 아이스크림 먹는 백곰, 합성수지, 레진180×220×170cm 2008
그들에게 있어 청지기 윤리란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임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복을 위해, 낮고 힘없는 자들을 침탈하고 지배하고
주입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변대용의 설치작품을 보면 우화같은 장면이 나타난다. 우화란 것이 뭔가
말 그대로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의 약점과 나약함,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각가 변대용은
동물-인간의 형상을 일종의 사회적 풍경의 일환으로 가져와서 우리들에게 말을 건낸다.
변대용_아이스크림 먹는 백곰_레진_180×220×170cm_2008
그가 조형한 작품들의 세계 속엔 자본의 힘과 폭력 속에 파괴된 자연이,
문명에 종속되는 현실이 그려져 있다. 더위를 잊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핥고 더위로 인해
변색한 자신의 피부털을 감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흰색을 바르는 곰의 형상이 작품 속에 나타난다.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 때문에 왜 고릴라들이 힘겨워하는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영방송 MBC의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과 같은 한편의 작품이 고맙다. 다큐멘터리의
본유적인 기능인 훈계를, 가르침을,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변대용_아이스크림 먹는 백곰 Ⅱ_합성수지, 레진_18×50×35cm_2008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경제성의 논리를 갖다대면 어떻게 될까?
돈이 안되는 다큐멘터리를 없애고, 잘 나가는 연예인들로 빵빵하게 채운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를
구성하면 많은 광고수익을 내겠지만, 우리는 그만큼, 우리의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는 카메라의 힘과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방송이 가진 저널리즘의 역할론을 이야기 함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다.
조중동이 주장하는 것처럼, 방송의 민영화 문제와 재벌과 언론족벌체제의 방송 겸업이
왜 문제인지는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도 좋을 듯 하다.
변대용_아이스크림 먹는 백곰 Ⅲ_합성수지, 레진_50×31×42cm_2008
자연환경을 개발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은 환경보호론의 주장을 일축하기 일쑤다
심지어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종의 좌파의 음모론이라고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부시 행정부만큼
전 지구적인 환경보호 노력과 역행한 정권도 없다. 쿄토 의정서엔 여전히 조인하지 않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산화탄소를 내뿜는 국가는, 자신의 군사력에 의거, 약소국에만 환경윤리를 지키라는
이중적 잣대와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변대용_아이스크림 먹는 백곰 Ⅳ_합성수지, 레진_20×40×45cm_2008
하긴 이명박 대통령 또한 <녹색성장>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결국 아르헨티나에 나무 심어주고 그만큼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얻어내면 된다고
주장하니, 이 정부에게 환경에 대한 윤리나 기본적인 지침을 기대하기란 애시당초 어렵다.
변대용의 조각을 보면 끝이 씁쓸하다.
그 속에는 우화 속 주인공의 처지가, 조각품의 운명이 아닌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될 것 같아서다. 제발 말로만 녹색 성장을 이야기 하지 말고
초록빛 계획과 실행, 이에 대한 정확한 감사가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해주기 바란다. 할말 없으면 '소통부재'를 운운하며
아고라나 다니며 헛발질을 할 시간에 머리를 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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