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봄날은 간다-수색 그 물빛 무늬의 기억

패션 큐레이터 2004. 6. 14. 03:13

S#1-수색 그 물빛 무늬

 

지난 시간들을 되돌이켜 보았습니다. 지난 거의 3년여의 시간.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 한국영화라곤 딱 한편을 보았더랬습니다. 다 지나간 영화의 흔적을 살피는 일은 사실 제겐 그리 심심하지 만은 않았습니다. 예전 함께 일했던 감독의 영화를 보는 일 또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일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입니다. 허진호 감독님은 제가 영화사에서 일하던 시절 '8월의 크리스마스'란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만났던 사람입니다. 녹음기사 상우가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채록하며 가지고 다녔던 '나그라 녹음기'의 풍경또한 제겐 익숙합니다. 자연의 풍광속, 그 내면의 핏줄 가득 엉켜버린 자연의 소리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감싸고 돕니다.

 

 

 

시냇물과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바람의 소리를 넘어, 정치한 산사의 풍경소리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영상과 음향의 배합을 통해 변해가는 시간속에 '사랑'이란 주관적인 경험의 방식이 어떻게 위치하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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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허진호 감독은 개인적으로 말이 없고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속에서 '사진'이라는 소품을 적절히 이용하는걸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항상 죽은 영혼들이 '고체'가 된채 응고된 기억의 저장고처럼, 잊혀진 것들이 다시 되살아나와 우리 안에 그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립니다.

 

젊은 시절의 남편은 기억하지만 늙어서의 남편은 기억하기를 거절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그녀의 망막속에 아로새겨진 젊은 시절의 꽃다운 사랑만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이 왔다고 믿는 순간...그렇게 우리내 생의 봄날은 가는 것을....."너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헤어지자" 이 3음절의 말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젊은 날 나에게도 세겨진 아픔의 무늬이기 때문일 겁니다. 벗꽃이 가득한 레스토랑과 바람과 물빛 무늬 가득한 강릉의 풍경들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자연은 마치 상처받은 두 사람을 기억해내고선 자신의 숨결로 우리를 품는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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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의 소리를 듣습니다. 속으로 울고 있는 그 갈대의 눕힘의 풍광속에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흘리고 있는 그의 눈물을 봅니다. d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그녀는 이제 망자가 되어 자신이 그리워 하는 사랑의 곁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항상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수색역 서늘한 나무의자위에서 망연한 기다림만을 삼켜온 그녀의 얼굴을 봅니다.

 

'이제 정신차리세요 할머니' 상우의 목소리는 마치 오랜 세월의 기다림의 몫을 이해하기 시작한듯 그렇게 울어댑니다. 고쟁이속 고이 감싸놓은 박하사탕을 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의 모습.

 

아마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환약을 손바닥에 쥐어주는 그 모습이, 아련하고 정치한 풍경으로 남습니다.f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을 잊습니다. 그와 함께한 시간과 따스한 체온의 기억만이 내 몸에 새겨진채 체취와 함께 각인된 마음의 봉인을 다시 열고 새로운 기억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터입니다.

 

허진호의 영화〈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관한 담론, 그 중에서도 사랑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담론입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상처와 치유'에 관한 지점으로 약간만 시선을 돌리면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 되지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치유는 곧 기억과 망각에 다름 아니고 영화는 끊임없이 기억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허진호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사랑이 시간으로, 시간이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랑과 시간의 이동은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끊임없이 스며드는 삼투압 현상과 같은 것이고 영화는 단지 외형적으로만 시간을 덮어 쓴 사랑의 담론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사랑이 드러나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하고, 시간이 감지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허진호는 독특한 방식―시간으로 쓴 사랑이야기 혹은 사랑으로 쓴 시간이야기―으로 사랑과 동시에 시간을 성찰합니다.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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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나를 둘러싸며 뒤와 앞으로 그 운동을 계속합니다. 사랑에 대한 기억또한 그러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소 답답함이 가슴속에 메어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첫사랑의 기억 앞에서 웃을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지속은 전진하면서 팽창하고 미래를 파먹는 과거의 연속적 진보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순간부터 한없이 그 과거는 스스로 보존되고 있다.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

 

사랑은 그렇게 전진과 팽창을 계속합니다. 상우에게 있어 은수는 그가 걸어가야할 미래를 위해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기억의 띠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되더라도 그 과거는 내 기억의 분수령 속에서 끊임없이 흩뿌려지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채 보존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겠지요.

 

아름다운 소리속에 그냥 뭍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은 날. 유난히도 비가 많이 들이쳐서 창밖으로 흐르는 빗방울 수만큼 아픔의 기억이 가득할때.......

 

살갗이 벗겨진 corch: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中)

 

그렇게 가벼운 상처의 현존속에서 아픔을 느낄때 난 여전히 시간의 흐름속에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임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왜 이다지도 하기가 어려운 것인지요.....여러분들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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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위의 사진을 찍은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가네요. 캐나다 유학시절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안의 니토베 가든에서 찍었던 사진이에요. 봄빛 가득한 벗꽃들이 연두빛과 어울어져 봄의 빛깔들을 토해내던 시간의 기억들이....그렇게 오늘따라 아스라히 내 기억의 망막을 스쳐갑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비록 봄날은 갈지라도 사실 내가 살아내야 할 수많은 봄날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