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쨍한 사랑 노래-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패션 큐레이터 2006. 3. 12. 22:01

 

 

봄빛 가득한 시간을 꿈꾸었으나

여전히 해빙의 시간을 증오하는 겨울의 환은 우리 곁에서 여전히

자신의 폭력을 꽃샘추위의 형식으로 남기고 맙니다. 아직 얼마나 더 지나야

연두빛 봄의 왈츠를 출수 있는 걸까요? 겨우내 얼었던 감성들도 이제는 좀 녹아 내리고

그렇게 요지부동하던 사랑의 감정들도 마치 봄의 시간에 녹아내려

마지막 바다를 향해 흘러가야 한다고 속으로는 떠들고 있지만 여전히 실제는 멀기만 합니다.

 

오늘은 서양 미술사에서 뽑은 가장 가슴 쨍한 연애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 그 둘의 가슴서린 사랑에

왠지 눈물이 나는 하루입니다.

 

사랑한다면 아마도 이들처럼은 해야 할거라고 속으로 그렇게 다짐해 보면서 말이죠.

 

 

모딜리아니

'잔 에뷔테른의 옆 얼굴' 1918

개인소장

 

러시아의 시인 일리아 에렌부르그가 그리는 화가 모딜리아니.....

"이렇게 해서 전설은 태어났다. 가난하고 몸가짐이 거칠고 언제나 술에 취해 있는 그림쟁이.

최후의 보헤미안, 술집과 술집 사이를 떠돌며 가끔은 이상한 초상화를 그리고,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유명해진 사나이, 이 말은 모두 정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거짓말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

'잔 애뷔테른의 초상화' 1918

개인소장

 

지속 가능한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없다.

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저 난폭한 시간 앞에서 막막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다만 구체적인 것은 현존하는 두 사람의 육체일 뿐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두 존재의
결합이라는 연애시의 욕망은 사실은 그 어긋남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전제한다.

그러니 모든 연애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으로써 연애의 주체는 사랑이라는 상처 속에서

실존적 동일성을 부여받는 것이 나닐까? 어쩌면 사랑을 방해하는 제도적 현실에 대한
경멸조차도, 그 사랑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은폐하는 알리바이일지도 모른다.

상처의 뼈아픈 깊이를 통해서, 연애에 처한 자는 주체성을 얻는다.
소통의 지속성이 아니라 부재의 지속성이, 사랑의 벗어날 수 없는 중독성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그 모든 부재와 상실과 환멸이 역설적으로 사랑을
증거한다.


'연애시를 읽는 몇 가지 이유' 중에서 이광호

 

 

사랑을 얻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두 사람의 영원한 하나됨으로

믿었던 여자, 잔 에뷔테른, 병약했던 마약쟁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직후

그녀는 잉태한 아이와 함께 투신자살로 그 삶을 마치고 맙니다.

 

그들이 사랑한 3년여의 시간, 그들은 너무나도 사랑을 합니다. 소설속에서나

나올만큼의 사랑의 무게를 그렇게 저 기다랗고 가녀린, 그래서 마치 고딕풍의 건축을

보는듯한 그녀의 자유한 몸은, 사랑을 보내고, 그렇게 자신도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살았던 그녀의

죽음은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리 시대의 '신화'로 만드는 데 일종의 작용을 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모딜리아니

'황색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1918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그녀의 별명은 '코코넛 열매' 그녀의 두상이 코코넛 모양을 닮았고

하얀 속살이 마치 코코넛의 과육같아 불려진 별명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은 화가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화가가 좋아하던 대마초도 끊고요

하지만 결핵으로 고생하던 화가는 결국 1920년 11월 25일 뇌막염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주검 앞에서 절규하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합니다.

그 상처의 시간이 아물기도 전에 그녀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솔직히 모딜리아니의 삶을 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집니다. 이 여인이 없이

그가 과연 살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화가의 미약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빛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딜리아니

'앉아있는 잔 에뷔테른' 1918,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최근 '쨍한 사랑 노래'라는 연애시 선집을 읽고 있습니다.

연애시를 읽는 것은 타인의 깊은 내면의 장면들 속에서 자기 생을 들여다 보는 모험이다

라고 쓰여있더군요. 어차피 연애시를 읽는 다는 것은 나와 타자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될 터이니 시를 읽어가는 과정 에서 조차도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그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듯 합니다.

 

그래서일까.....죽음을 앞두고 거의 병적으로 아내의 초상화를 그렸던

이 남자의 마음이 이해가기 시작합니다. 26점의 초상화, 아내를 평생 곁에 두고 싶었지만

죽음은 그 둘을 갈라놓고, 이러한 병리와 이별 앞에서 그는 캔버스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영혼을 담아 각인시켜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를 그린 초상화를 사람들은 아내에게 쓰는 연애편지라고

별칭을 붙여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딜리아니

'아내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어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사늘 속에 있다.

 

이성복의 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 중에서

 

지금 나이가 몇인데.....아직도 이런 사랑을 꿈꾸느냐고 그렇게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사랑은 여전히 영원한 타자의 모습이니까요.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내 존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은

꼭 다른 한 사람이 나와 껴안고 있는 풍경 속에서만 따스한 풍경소리가 난 다는 것을

이렇게 또 배우고 배웁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오늘은 편지를 써야 겠습니다.

"나도 당신따라 콱 죽어버릴까"라고 쓰면 어떨가요? 무슨 말을 들을까요?

'자기야 너무 멋져' 혹은 '어이구 저 인간 언제 철들라누...에이구 내 팔자야'

어떤 말을 들어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가슴 속 내 풍경의 퍼즐을 갖고 있는 여인에게

가슴 쨍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그렇게 말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