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소리가 생각을 지배한다-그림 속 동성애를 찾아서

패션 큐레이터 2006. 2. 24. 20:14

 

 

예술가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개
1884-89
캔버스에 유화
30 x 23 inch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뉴욕

 

좋아했던 시인 기형도와 한살터울이었던 시인....전연옥, 대학 1학년때였나, 민음에서 나온 그녀의 시집속 사진을 보고 두꺼운 뿔테 안경의 시인이 참 '시를 쓰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느꼈던 적이 있다. 그녀가 쓴 '불란서 영화처럼'이란 시를 이후로 참 좋아했었다. 그녀는 시에서 우리 모두가 왜 불란서 영화처럼 우아할수 없는가에 대해 한탄했다. 사랑의 방법론을 찾고 싶어했고, 지극히 간단한 보폭만으로 악몽의 길고 긴 회랑을 빠져 나오고 싶어했던 그녀의 글은 그 당시 힘들어하던 나를 많이 붙잡아 주었다.

 

토마스 이킨스의 그림 속 '화가의 아내'는 시인과 참 많이 닮았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나 한나 맥도웰, 그녀또한 화가였으며, 저명한 사진작가였다 1884년 그들의 결혼은 이킨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전연옥의 시가 좋을까.전여옥이 아니라 전연옥이다. 오해없기 바란다.

 

 

토마스 이킨스의 '불결한 병원' 1875
캔버스에 유화 96 x 78 in.
제퍼슨대학교, 의과대학, 필라델피아

 

1844년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한 화가는 5년간 프랑스의 에콜드 보자르를 다닌 시간을 제외하고는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고향에서 보냈다. 그는 미국의 리얼리즘 화풍을 새롭게 개척한 작가다. 그의 그림속에는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때로는 매를 벌어야 했던 그런 그림들이 꽤 많다. 위의 그림인 '불결한 병원'도 그 묘사의 사실성과 빛의 사용으로 양식사적으로는 최상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만, 당대의 비난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남성들의 누드를 참 많이 그린 화가다. 일부에서는 그가 동성애자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단지 그는 사실주의 화풍에 근거에 매우 과학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남성 모델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현대에 와서 남자들의 동성애를 회화에서 찾아낼때 그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주 진부한 일이 되었다.

 

 

레슬링, 1899

토마스 이킨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뉴욕

 

난 이 그림을 볼때마다 요즘 모 통신사의 광고가 떠오른다. "소리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그 CF의 한 장면 말이다. 땀을 흘리며 자신의 장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레슬링 선수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에로틱하게 보이기도 하니 참 특이한 일이다.

 

 

토마스 이킨스, 수영장,1885

캔버스에 유화,

아몬카터 미술관, 포트워스, 텍사스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욕장면을 위시로 하여, 예전부터 회화속에 암유적으로 드러난 동성애의 코드는 다양한다. 특히 토마스 이킨스의 그림은 다이나믹한 장면구성과 남성들의 육체적 매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기에, 더욱 그러한 의심은 증폭되고 강해진다.

 

남성의 육체를 이성적 존재로 고려했던 그리스 시대 이후로 항상 남성의 누드는 여성의 누드와는 다른 대접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킨스의 그림 속 남성들의 나체는 그러한 우월주의를 아주 깨끗하게 깨버린다. 유리갑옷 속에서 스스로를 감추어왔던 남자들의 자존심을 깨버리기라도 하듯....

 

 

토마스 이킨스(1844-1916)

반환점을 도는 비글린 형제, 1874

캔버스에 유화

클리블랜드 미술관

 

1870년대 조정은 상당히 새로운 스포츠였다. 필라델피아는 이러한 신규 스포츠의 새로운 발상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킨스의 그림 속 남성성은 새로운 스포츠를 통해서 새롭게 재현되고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과 형태의 미를 그림 속에서 재현한 이킨스의 그림에는 여전히 남성의 근육질과 그 매력에 대한 그의 취미를 보여주는 여러가지 단서들이 있다.

 

 

토마스 이킨스

미스 반 뷰렌, 1886

캔버스에 유화, 113.1 x 81.3 cm (44 1/2 x 32 in)

필립스 콜렉션, 워싱턴


끝으로 전연옥의 시를 한편 올리는 것으로 이킨스의 그림읽기를 간단하게 마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방법들은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로 매냥 피곤한 것뿐일까
고통의 다리를 뻗고 누워 안식의 깊은 잠을 청할
미래의 내 묘자리가 사나와서 그런 것일까
주일날 늦은 아침
아득한 벌판에 홀로 서서 해바라기를 즐기고
그대로 어둑한 그림자가 되어 저물녘을 헤매일 때
내 사랑은 불란서 영화처럼 우아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때로,
유치했던 기억들은 몸살나게 아름다워
접어 두었던 미래와의 약속을 새롭게 하거나
부재중인 희망도 달무리로 돌아오게 한다
그래서 침묵은 이다지도 낯선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뒤틀린 손금을 보고 진저리를 치겠지만
그리하여 지극히 간단한 보폭으로
악몽의 길고 긴 회랑을 빠져 나오겠지만

나는 그때 얼마나 가득해진 모습으로
병약한 내 일생의 녹슨 고리를 벗겨낼 수 있을까
잘 영근 생각으로 선택의 생각을 공손히 다듬고
나를 가두고 있는 불치의 소문들도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때 내 사랑의 방법들은 좀더 구라파식으로
좀더 삼류적으로 비감해질 수 있을까
사나운 잠자리를 탓하지 않고
원색의 현란한 꿈의 밧줄에
내 사랑의 방법론을 매달 수는 없을까

 

전연옥의 '불란서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