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 지는 법이다 그것은 자연이 광대하거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만은 아닌듯 하다 자연은 스스로의 의미처럼 스스로의 존재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겸손하게 이 우주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한철의 기억을 더듬어 가면 많은 시간의 결들이 오롯하게 성글어 가지만, 그 중에 멋진 기억들을 굳이 고르라면 프란츠 요셉 빙하를 2박 3일동안 탄 것이다. 능선을 따라....빙하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강렬함을 내 약한 갈색빛 동공으로는 담아낼수 없어서 소스라치게 놀래야 했던 기억들.....오랜 세월동안 녹고 얼고....이 모든 반복된 과정들을 묵묵히 수행하며 빙하의 태고적 움직임들은 이제 내 눈 앞에서 빙결의 나이테를 드러내며 웅장하게 서있다. 자연은 결코 강압적으로 시간의 무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인내와 참음의 이중적 질곡의 과정을 통해서만 서로의 존재론을 부화시킨다.
참 춥고도 쉽지 않았던 등반길 가져 갔던 카메라는 마침 내리는 비로 인해 쓰지 못하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건질수 있는 그 당시의 시간의 격자는 사진 4장이 전부였다. 빙하란 오랜 세월 물과 눈과 압력들의 길항작용으로 만들어 지는 산물이다. 그 속에는 이미 응고되어 버린 시간의 무늬들이 숨쉬고 있는 셈이다. 빙하는 부재했던 존재의 숨결을 차가운 껴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부재증명에 대한 존재론을 써간다. 뒤돌아 보면 뉴질랜드를 여행하던 시절 난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여행의 과정이 행복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온 감정의 결들이 내 뒤에 서슬하게 서있음을 본 것이었다. 미워했던 사람들도 참 많았고 개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기업의 문화적 속성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고, 적응 방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빙하를 올라가는 순간 순간......햇살은 푸르는 빛이 도는 빙하의 창을 뚫고 내 살갓위에 덮혔다. 마치 빙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해 태양은 자신의 존재속에 양태하는
여러가지 빛깔을 내 안에 투사해 보여주는 것 같았다. 회귀를 향한 소멸,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중첩된 시간감(時間感), 거기에 대응하는 중첩된 공간, 중심에서 비켜서기, 중심적 타자와의 관계성 - 타자와의 빈번하고 익숙한 관계의 총체 빙하는 이 모든 추상적인 관념들의 그물은 단지 자연스레 그곳에 서있음으로서 보여준다
빙하를 통과하던 그때가 그립다......
이럴땐 참 많이 난감하다...더이상 부박한 생의 무늬를 그려서는 안되기에
멋진 추억으로만 남아보기를 바래본다.
(예전의 사진들을 올리면서 느끼는 것은 이제 필름 카메라를 스캔 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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