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마이클 호페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Beloved'그의 앨범 첫 번째에 실린 연주곡이죠. 연주를 듣고 있자니 마치 다른 공간속으로 옮겨가고 있는 느낌마저 듭니다. 남세스럽기만 한 글쓰기를 시작한지도 3개월이 다 되어갑네요.사람들은 제게 말합니다.'참 바쁘게 산다' 보통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칼럼에 글을 올리는 시간은 새벽이 보통이지요. 회사를 마치고 예술의 전당으로 달려가 오페라홀 5층에 있는 발레 마스터 클래스를 수강합니다. 무용을 배우게 된 것은 신체에 대한 긴장과 표현에 대한 애정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표현할수 있는 매체를 하나쯤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흔히 무용을 '침묵의 수사학'이라고 하잖아요. 이 무용의 언어를 배우는 동안 저는 감지할수 있었습니다. 고요한 침묵속에 놓여진 내 신체의 내부에서 새로운 들숨과 날숨의 교차가 이루어 지고 있음을.....땀을 흘리면서 신체의 일부분을 찟는 행위를 통해 근육들을 수축시키고 이완시킵니다. 이를 통해서 생의 가운데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각질처럼 되어 버린 제 감성들을 다시 복원시키는 거지요. 연습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오늘은 무슨 주제로 칼럼을 쓸까하고 생각을 합니다.
페미니즘이란 화두를 만나고,이를 실천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저는 그 분들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상처의 풍경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서 비판의 활시위를 당기는 강철의 아마조네스를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에게 현존하는 상처에 대해 눈 뜨게 되면서, 제게 페미니즘이란 삶의 화두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담론이나 이론을 쉽게 쓰는 작업을 했고 이것을 문화란 텍스트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에만 몰두했지요. 하지만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저는 왠지 모를 답답함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삶의 프로젝트와 연결되지 못하고 단순하게 총론적이고 미려한 말들의 유희로 끝나 버리는 것, 새로운 반성이 필요하다고 믿게 된거죠.
내 사유의 뜨락 위에 놓여진 기억의 앙금들을......적어도 내 개인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복원해 가는 페미니즘이 되기를 바라게 된 겁니다. 이 때부터 저의 글쓰기는 3인칭의 욕망을 버렸습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글......보다 영세하지만 자신의 삶이 녹아있기에 진실할수 있는 1인칭의 목소리를 가지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반디나 쉬바의 '에코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의 새로운 형식과 목소리가 제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결코 배치되는 어떤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여성 그리고 환경......절대자가 지으신 피조물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파괴를 일삼은 남성 중심적인 가치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자본의 욕망,발전이라는 미망의 이데올로기,성차에 근거한 터무니없는 위계질서.그런 삶의 과정속에서 저를 포함한 남자라는 존재 또한 불행할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더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에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몇가지 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자연의 억압과 여성의 억압이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라고 주장하는 관점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세계를 경작하고 풍성하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이 경작의 의미를 개발과 착취의 개념으로 오인한 우리들이 절대자의 선한 의지를 저 버리고 자신의 욕망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고 그 안의 피조물인 여성들의 삶 또한 식민화 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수 없었지요. 요즘 기독교는 뉴에이지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뉴에이지라는 것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아도 싸워야 할 하나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다른 연안으로 가고 있다.
-황지우의 시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중에서
동양의 이방종교와 혼합된 교리, 초월명상이나 선 마술 대체 건강법. 신비주의자들을 이런 것들을 주류 문화에 편승시키면서 자본주의와 다시 한번 결합합니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는 셈이지요. 선진국들의 이러한 사치스러운 정신주의 혹은 변질된 영성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분리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이원론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 내재하고 있는 진정한 인간의 형상에 대한 복원의 꿈을 사멸시켜 버립니다.
대양을 횡단하는 철새들이 그 장구한 여정을 마칠수 있는 힘의
내면에는 바로 그들의 비행법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V자 대형으로 편대를 짜서 하늘을 비행합니다. 그 이유는 V자 형으로 비행을 할 때 가장 공기의 저항이 적어서 많은 에너지를 서서히 분산시키며 소진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숲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감의 의미를 이제는 다시 한번 재고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환경 그 안에서 조응하는 인간.이 세 가지 존재들이 서로 공존성(codependence)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타자화 하듯 그렇게 인간이 자연을 타자화 할 때, 이것은 이 세상을 지으신 절대자의 선한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구요.
어린 시절 제가 살았던 곳은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철새들을 볼수 있었지요. 높은 옥타브로 울면서 이 지상의 갈대밭을 비상하던 그 생물들, 오랜 세월 속에서 아픔의 지층을 내면속으로 하나씩 쌓아가는 그 자연의 신비.
그 앞에서 경외감으로 바라보았던 하늘을 기억하고 싶어졌습니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부여했던 자연에 대한 현명한 '청지기 의식'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이 자연을 배제할 때 이 모든 것을 지으신 이가 우리의 교만함과 욕망을 보시고 보응하리라는 작은 믿음을 오늘 다시 한번 굳건하게 가져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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