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서양화가 황주리의 그림에서는 피리 소리가 들린다. 어떤 피리 소리인가? 피리로 마을의 쥐떼를 없애주었으나 배척당한 뒤 어린이들을 이끌고 사라져버린 동화 속 피리쟁이의 피리 소리이다. 또 성경 속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시대를 탓한, 사람의 아들 예수의 피리 소리이다. 황주리는 소통의 단절을 시대의 현실로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그림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피리 소리를 수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때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일까지는 나의 일이나, 그 편지의 겉봉에 수신인으로 적힌 사람의 마음에 가 닿는 일은 이미 나의 몫이 아니다. 그 편지가 비에 젖어 거리의 모퉁이에 버려지거나, 늘 그렇듯이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보내는 사람의 애정이 듬뿍 담긴 그런 편지를 쓰고 싶다."
그의 캔버스 위에는 사람들이 늘 북적댄다. 그러나 그들은 개성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생김새도 행동거지도 다 단순화되고 정형화된 무명의 존재들이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이리저리 막히고 파편화된 '한계 공간'이다. 이 같은 한계 상황은 사회가 개인들의 이용가치를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 조장한 것이다. 그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사회는 그들을 벌레 털듯 떨궈 내버릴 것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간들은 꼬물꼬물 자신의 행위에만 열중해 있다.
우리들의 천국/ 1985 / 202 x 249 / Acrylic on canvas
우리는 분명 '언어적 동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언어가 없다. '언어=소통'이 전제돼야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도 사회적 존재라는 것도 의미를 갖는다. 또 도구를 사용해 삶을 확장하고 창조하는 행위도 그 합목적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구슬을 꿰는 줄' 같은, '언어적 동물'로서의 정체성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황주리는 줄기차게 그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상실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이 그림 저 그림 사이를 맴도는 그의 그림 속 현상들은 때로 현실에 대한 직설법적인 고발이다. 황주리 그림은 그 특유의 노골적인 상징에 의지해 우리에게 그 어떤 형식보다도 절실한 방식으로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안타까운 피리 소리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 피리 소리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들릴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비록 이렇게 허무한 세상 속에 산다고 해도 그는 결코 허무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같은 소통의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들어주는 이가 얼마나 되든 어쨌든 그는 계속 발언할 기회를 얻고 있고, 그것은 그에게 분명 고마운 일이다. 비록 '시 없는 시대'의 '시인'이긴 하지만, 그 역시 시인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행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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