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친절한 금자씨-화이트 케익이 비가 되어 내리면

패션 큐레이터 2005. 8. 3. 09:57

S#1-차가운, 하지만 달콤한 초콜렛 무스

 

살다보면 소소한 문제로 싸우게 되고, 본의 아니게 주먹질까지 가게 될 경우도 있다. 캐나다든 한국이든 도시적 생을 살다보면 주차 문제와 운전중에 이런 일들을 참 많이 겪는다. 우리가 운전을 하는 이유도 우리가 가야할 어떠한 거리를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다.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양쪽이 갈등을 겪을 때가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는 공익광고를 수없이 보지 않는가?

 

 

 

그 양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일부 양도하여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질서를 세우는 힘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권리 양도가 바로 사회계약이다. 또한 사회계약을 통해 이룩한 인위적인 힘이 바로 국가 권력이다. 주차 문제에 빗대어 말한다면, 주차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을 조금씩 양도하여,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주차 질서(제도나 법률 같은 것)를 세우는 것이다. 주차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계약인 셈이다.

 

 

그러한 계약에 의해 성립된 인위적인 힘 역시 결국 국가 권력이다. 주차 문제를 놓고 벌어진 시비가 폭력으로 발전하면, 경찰이라는 국가 권력 기관이 개입한다. 그리고 주자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에게는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하여, 일정액의 돈을 강제로 납부하게 한다.

 

우리는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타인에 대한 폭력의 행사를 이러한 국가기관의 손에 맡겨왔다. 적어도 구약시대의 상해보복식 법칙은 맞아들어가지 않는 사회란 점이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할 영화 '친철한 금자씨"는 바로 이러한 폭력행사의 정당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자신을 아동 유괴범및 살해범으로 만들어 버린 남자에 대한 복수. 사랑하는 딸을 되찾기 위해 그녀는 13년간을 감옥에서 '너무나도 친절한 금자씨'로 살아간다. 올리비아 핫세를 닮았다는 그녀.......

 

 

 

영화가 시작하는 인트로 화면은 온통 백색위에 펼쳐지는 붉은 선홍색의 유동적인 액체의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마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가 마셔야할 핏빛 복수처럼 말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의 복수계획에 전혀 일련의 이견도 제의하지 않으며, 철저한 동정심과 동조가 존재한다. 아니, 그러한 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살인계획을 위해 복수의 대상이 되는 '백선생'과 결혼해서 살림까지 차리는 꽃뱀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침밥을 먹다가도 식탁에 드러누워 변태적인 욕구까치 채워주면서, 오로지 금자의 복수를 위해 교사를 계획하는 그들의 행태또한 참 볼만하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작가적 시선으로 '개인이 베풀수 있는 복수의 한계'를 보여주는듯 하다.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약간 긴장감이 떨어지고, 도덕적인 투사로 변해가는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상해보복식' 의 방식에 대해서 왜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적어도 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말이다.

 

 

그건 아무래도 폭력행사의 대행자인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이제는 더이상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불신의 골이 깊어가기 때문이리라. 요즘 화두로 뜨는 엑스파일 문제도 그렇다. 삼성은 이미 거대한 자본을 통해 법조인들을 매수했고, 특검팀의 한 일부로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끌고 나가야 할 게임의 법칙은 철저하게 '불법 도청'의 문제지 결코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해야 할 판이다.

 

삼성은 이 게임에서 지지 않을것 같다. 이미 정경유착을 넘어, 법경유착의 세대로 변해가는 우리 근대의 한국사회는 더이상 기업의 도덕성을 평가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와중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에게 '만인이 폭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영화적 실험은 솔직히 매력있다.

 

적어도 영화중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우리에게 말하는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자의 복수는 결국 존재론의 문제로 귀착이 되고, '네 죄가 진홍빛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하얗게 되리라"는 성경의 메세지처럼, 그녀는 복수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 적어도 백선생을 두고 그에게 살해를 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하나하나 처벌한 개별적인 복수가 펼쳐지기전, 그들의 태도는 다소 유동적이고, 개별적인 상해보복 보다는 집단적 상해보복을 통해 자의식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복수는 달콤한 것일까? 혹은 어떤 맛일까? 그녀가 내어놓는 달콤한 산딸기 무스 크림 케익처럼...그런 맛일까?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끝...양털처럼 햐얀 크림비가 우리 가슴속에 가득히 저며온다. 이제 화석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상처의 무늬들을 얼싸안고 도는 우리네 또 다른 가슴속에서.......이제는 쾡해진 우리들의 눈위 붉어진 혈흔을 지워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