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우리의 20세기-멋진 인생을 위한 자기훈육법

패션 큐레이터 2017. 11. 6. 23:34



영화 한 편을 봤다.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본게 언제인지 싶다. 예술영화를 좋아해서 시네큐브를 제 집 드나들듯 다닌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고 아이 키우다 보니 이런 여유도 쉽지 않다. 샤넬 코리아 강의를 마치고 운좋게 광화문으로 산책하다가 정말 생각없이 들어간 극장이었다. 그냥 시간대가 맞는 작품이 있으면 하나 봐야지 했다. 그렇게 <우리의 20세기>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사가 <HER>를 제작한 회사란 점이 우선 끌렸다. 최근 AI를 테마로 하는 영화들을 토론을 위해 큐레이션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보게 된 영화 <그녀>를 워낙 인상적으로 본 까닭도 있다. 게다가 아네트 베닝이라니, 그녀의 리즈시절을 기억하는 내겐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거기에 엘르 패닝과 그레타 거윅까지, "이 영화는 그냥 배우 파워 하나만 믿고 봐야지" 했다. 마이크 밀즈 감독의 연출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1979년이란 특정한 시간을 영화적 배경으로 한 이유가 종일 궁금했다. 영화 후,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그에게 "70년대 후반은 순수의 시대"란 점이다. 80년대는 브랜드의 시대였으며, 90년대는 인터넷 붐과 함께 거품경제의 전조가 시작되던 때였고, 그 이후는 세계경제의 하강기와 더불어 전 세계적 빈부격차가 더욱 커졌다.  감독에게는 이 시기 1970년대 후반에 영화 속 모든 여자들을 소환해야 할 내러티브적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캐릭터들의 설명이 하나씩 펼쳐지면서, 그 이유는 명징해진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살아낸 신 여성 어머니 도로시, 60년대와 70년대 초반을 자유로운 히피세대의 감성으로 살아낸 윌리엄 아저씨,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의 펑크정신을 보여주는 에비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여성들은 자신들을 키운 유년기가 각자 다르다. 그 세대만큼의 감성과 삶의 기준을 갖고 있다. 특히 에비는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한 예비작가다. 그녀는 미국에서 60년대 후반부터 끓어오르던 페미니즘의 사고로 무장한 예비 작가다. 한 마디로 영화 속 인물들은 각 세대가 가진 문화적 숙제가 와 경험을 수용하는 방식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아들 제이미를 키우기 위해, 에이미와 윌리엄, 제이미의 친구 줄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지혜를 함께 빌려 아들과 소통하고 싶은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그녀의 쉐어 하우스는 항상 문화적 전쟁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 전쟁상태라는 것이 의외로 흥미롭다. 되돌아보면 우리들의 살아낸 마법의, 기적의 시간인 것일테니 말이다. 결국 20세기의 각 시대를 10년 단위로 살펴보는 일은, 필자같은 복식사가들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이었던 마이크 밀즈에게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0년 단위로 동류그룹을 만들고, 그 그룹이 한 시대를 풍미하고 바꾼다. 각 세대별로 자신을 추켜세우거나, 혹은 모멸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이들 모두의 삶이 누적되어 현재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연출력이 놀라운 것은, 그들이 대화신이 상당히 자연스레 흐른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세대를 대표하는 각자의 의상에서 헤어 스타일, 문화적 소품까지 여찌나 정교하게 신경을 썼던지 놀라왔다. 꼭 미장센 같은 단어를 쓰지 않으려고 해도 테이블보의 컬러와, 각 캐릭터들이 입고 있는 의상의 디테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계산해 넣은 티가 난다. 


이 영화에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흥미로운 논평이 많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에이미의 영향으로 제이미는 좋은 남자의 기준을 배운다. 어느 날, 제이미는 한 마디로 여자들을 '공격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답이라고 믿는 친구에게 좋은 남자의 기준을 늘어놓다가 흠씬 두들겨맞는다. 1960년대 중반, 중독적인 남성성(Toxic Masculinity)에 빠진 남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어디 60년대만의 문제겠는가? 서구나 동양 모두 가부장제의 강력한 사슬이 풀리기 전의 남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선 심리학자 마틴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이나 수전 손택의 <사진론> 페미니즘 교본이었던 <Our Bodies, Ourselves> 등이 등장한다. 특히 『아직도 가야할 길』은 내게도 인생의 한 좌표를 마련해준, 적어도 시기별로 다가오는 생의 과제들 앞에서 움추리지 않도록 해준 명작이다. 삶은 거대하고 복잡하지만, 이 삶은 나란 주체와 함께 진화의 과정 중에 있다는 것, 결국 삶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며 이를 수용할 때 인간은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 아니던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책의 메시지를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선택의 힘과 책임을 주장했던 실존주의자들의 철학을 이 책 보다 잘 녹여낸 메시지를 난 여전히 지금도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 멋진 인생을 위한 자기훈육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이 영화에서 작은 메세지들을 찾아낸 것 같다. 인간은 결국 나 자신을 혼내고, 격려하며 앞으로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랄까? 영화 한편이 주는 상쾌함이 꽤 컸다. DVD로 소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