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밀정-결국 인간은 마음의 결정을 따른다

패션 큐레이터 2016. 9. 19. 05:48




자아의 변화하는 그림자


1. 영화 <밀정>이 600만이 넘었다. 개봉과 동시에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오랜동안 리뷰 쓰기를 망설인 것은, 영화적 서사와 그 축을 이루는 인간의 변화하는 내면을 응시할수록 사유할 영화적 결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내 부족한 글솜씨로는 미세한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기가 쉽지않았다. 영화는 친일세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의열단'이란 실제 존재했던 단체와 그들과 엮여있는 '밀정인듯 밀정아닌' 이정출이란 존재의 대립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변화를 다룬다. 


2. 인간은 고난 속에서 여러가지 선택을 한다. 결국 선택의 결과는 주체에게 그대로 돌아간다. 오늘날 지겹게 친일파들이 자신을 변증할 때 쓰는 표현이 '그때는 모두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당시의 모든 이들이 내린 선택이 어쩔수 없었다는 식의 한탄과 친일은 자신의 것만이 아닌 보편적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두 개의 주장이 섞여있다. 모두 했으니 책임을 개별적으로 끄집어낼 수 없단다. 심지어는 당시는 나라를 잃은 무국적자의 상황이므로, 당시의 친일에 대해 처벌할 주체가 없다는 말을 하는 자도 봤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이 땅의 슬픈 근대사를 영화를 통해 복기하는 건 마음이 아팠다. 


3. 영화 속 의열단 단장 정채산은 이정출의 내면을 간파한다. 심연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정출의 부채의식을 건든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올려야 할 때가 온다며, 어느쪽에 서겠냐"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정출의 극적 변화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끝까지 작전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곡기를 끊고 죽어간 연계순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갈팡질팡하기엔, 떨림의 추는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정지상태가 된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다시 똑딱똑딱. 서대문 형무소에서 실제로 나는 우리 집안의 큰 아버지를 잃었다. 신사참배거부자로, 세 차례나 투옥되신 후 스스로 곡기를 끊어 아사하셨다. 아버지가 형의 뒤를 이어 기독신앙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이란 건 이래서 무섭다. 한 인간이 '믿음'을 통해 지금껏 살아왔던 노선을 버리고, 또 다른 노정 위에 선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 믿음의 변화에는 엄청나게 농축된 한 순간의 '때림'이 필요하다. 



4. 복식사가로서 의열단 멤버들의 패션이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에,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다는 그들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들과 함께 해주었을 끝내주게 멋진 수트와 코트가 눈에 선연하게 들어왔다. 우리는 흔히 장례식에서 삼베수의를 입는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이건 일제통치의 영향이 크다. 특히 장례업자들은 이 부분을 곡해하면서, 삼베수의가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전통은, 죽음의 순간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왔던 시절의 옷을 입고 죽었다. 여인들은 혼례복인 빨강색 활옷을, 남자들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 입었던 옷을 입었다고. 화려한 패션의 표면 위로, 재즈선율과 라벨의 볼레로가 흐르며, 숙청해야 할 인간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대조효과가 너무 큰 탓인지, 이 장면이 선율과 함께 머리 속에 남았다. 


5. 죽음을 준비하며 내면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의 옷맵시는 황홀하면서도 슬펐다. 역설의 시간을 온 몸으로 견디며 나아가는 아들의 슬픈 역사가 화려한 패션과 중첩되어 머리 속에 남았다. 그들의 온축된 생의 시간을 껴안아주는 저 잿빛코트가 내 눈안에서 빛났다. 물론 한지만의 패션도 고증이 정확한 탓에 눈에 거슬릴 일은 없었다. 은여우털로 만든 스톨과 종 모양의 클로슈 모자, 와인빛 코트가 깔끔하게 눈에 들어왔다. 


6. 영화 후 의열단의 숨은 역사를 읽었다. 그들은 운명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되 죽음에 예속되지 않았다. 친일의 뿌리가 생성되던, 그 현장에서 의연한 삶의 보편성을 믿었다. '독립이 될거라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많은 이들이 망설일 때,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나라 잃은 군인이라며 고적한 밤 바다에서 이정출에게 말을 건던 사내, 정채산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하게 내 안의 슬픔의 현을 튕긴다. 상처의 심층부로 파고 들어가기 위해 미약한 날개를 파득거리며 투쟁한 이들.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믿었다. 믿음이란 두 음절의 단어를 도저히 혀끝으로 발음하지 못하겠다. 몸으로 머리와 손 사이를 잇는 가장 우원한 거리의 결심을 실천한 이들. 이들에게 진 빚이 너무나 크다. 




7. 처절한 인간의 드라마를 마주할 때는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간 내면 속 비애와 상처가 심장 밑으로 쉬이 가라앉질 않아, 숨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영화적 서사의 무게가 내 심장을 누른 탓이리라. 글을 쓰면서 남우새스럽다. 내 언어가 '역설의 시간을 살아낸'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그 전투적인 생을 표현이라고 하고 있는건지 송구스럽다. 내 언어는 무디고, 시간 속에서 불어터진 우동면빨 같다. 사무치게 죄송했다. 영화의 끝장면, '살아서 만나야지요.....' 하며 조선총독부를 향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젊은이의 순수가 내 마음 속에서 요동친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양연화'의 순간이 아닌가. 


8. 영화 밀정을 보며 섬세한 마음의 변화를 연기하는 송강호씨의 모습에 다시 한번 반한다. 그는 참 존귀한 배우다. 세월이 흐르며 격과 연기의 호흡이 더욱 깊어지는 느낌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음의 변화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미세한 감정의 응결체에 어떻게 살을 붙일 수 있었을까 싶다. 변화라는 건 그 자체로 포착하기 힘들다.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한정된 몸의 언어, 특히나 평면적으로 들리는 한국어의 특성, 이 모든 것이 배우에겐 힘든 요소들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 서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를 한다는게 평론가들의 평처럼, 쉽지 않을텐데. 송강호는 이 어려운 숙제를 배우로서 해낸다. 이번 영화를 통해 송강호라는 배우를 더욱 깊게 보게 된다. 그가 없었다면 완성할 수 없는 서사의 결과 다공질의 영화적 텍스트가 꽤 많았다.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에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