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떠나 보내야 할 것들 앞에서 '당당하게'

패션 큐레이터 2016. 11. 22. 14:30



나를 떠나가는 것들

영화를 본다는 것, 불이 꺼진 극장의 영사를 통해, 내 눈과 귀를 통한 감각기관으로 흘러 들어오는 대사와 장면들을 애써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영화다. 영화 공부에 빠져 있던 과거, 개별 씬들 하나도 놓치기가 싫어서 스톱와치로 각 씬별로 흘러가는 구성들을 수치로 계산하던 때도 있었다. 예전 충무로에서 지방의 배급업자들만 모아놓고 하는 특별 시사회장에 영화 홍보업부를 위해 자주 갔었다. 그때 나도 함께 영화를 보며 꼭 머리 속에 복기해야 할 대사들을 '종이' 위에 끄적거려놓고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곤 했다. 지금이야 흘러간 추억이라 해도, 영화를 하나의 텍스트를 읽어내듯, 집요하고 대사와 대사 사이, 휴지 시간의 멈춤까지, 온 몸으로 읽어내던 그때가 그립다. 되돌아보면 이렇게 내게 왔다가 떠나가는 것들이 있다. 인생의 어느 한 때, 나를 받쳐주는 견고한 척추의 선처럼, 작동하던 정신의 사물들이, 인간관계가 있다. 누군가에겐 한 권의 책이, 그 속의 몇 줄의 단상들이, 타인의 삶이, 그럴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고등학교 철학교사인 나탈리는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한 남편과, 전직 모델로 3번의 이혼을 겪으며 딸을 키워낸 엄마의 우울증, 자녀의 독립, 무엇보다 자신의 사회적 자리를 만들어준 철학교사의 자리를 떠나 보내야 할 판이다.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들도 정말 많이 등장한다. 앙리 레비나스, 파스칼, 무엇보다 알랭의 행복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호르크 하이머와 같은 비판이론 철학자들의 이름도 거론된다. 그들의 아포리즘은 영화 속에 알알이 박혀있는 보석같다.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들리는 철학자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영화 속 남편도 철학과 교수인 모양이다. 내 마음의 빛나는 도덕률을 자랑하던, 칸트의 정신적 후예처럼 떠드는 남편은, 이혼과 함께 아내를 떠난다. 믿었던 제자도, 생각의 노선이 다른지 하나가 되긴 어렵다. 68혁명 세대의 과격했던 과거들을 지나온 나탈리에게, 현재 세대의 '혁명'은 꽤 먼 거리의 우원한 외침처럼 들린다. 


어머니를 보내고 그녀가 장례식장에서 읽었던 파스칼의 <팡세>는 한 마디 한 마디, 심중을 향해 마음껏 당겨진 화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 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게 보니, 나는 개탄할 상태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한줌의 생각이, 결국 계절의 변화처럼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 사그러들고, 그 어떤 철학도 우릴 구하지 못할 때, 그러나 그 사이사이마다 배어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떠나보내는 것과, 삶에서 다가오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절망할 때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우리의 믿음과 철학도 세대별로 교체된다. 사회와 세상이 변하니, 그것을 독해하고 변화시켰던 방법도 바뀌는 것일 뿐, 그 변화의 조짐 앞에서 조금은 당당해지면 어떨까? 시니어들을 위한 패션에 대한 고민도 그렇다. 그들의 옷이 너무 꽃을 닮아가고 울긋불긋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그들은 이미 떠나보낸 것들을, 화려한 그 무엇으로 치환하려고 고민하는 것이다. 시간의 강물에 흘려보내도 되는 것들을, 애써 잡으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들은 바로 지금 이순간, 너무나도 소중한 분들인데.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