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줌파 라히리의 <책이 입은 옷>을 읽었다. 책이 옷을 입는다는게 무슨 뜻일까? 이탈리아어 '소브라코페르타'에는 맞춤재킷이란 뜻과 책을 덮고 포장하며, 보호하기 위한 표지란 이중의 의미가 담겨있다. 표지 또한 수차례의 피팅을 통해 인간의 몸에 딱 맞는 재킷이 되듯, 책의 메시지에 딱 맞는 재킷같은 존재여야 한다. 표지는 저자의 글을 시각화해서,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책 표지가 저자의 메세지를 얼마나 잘 녹여냈는지는 의문일 때가 많다. 작가의 메시지와 서점에서 눈에 띠는 시장성 있는 디자인 사이에는 상충되는 지점이 많다, 타인의 작품 서평과 작가 스펙으로 한 켠을 채운 표지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줌파 라히리처럼, 나 또한 비슷한 감정에 빠진 적이 많아서다.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의 뱅골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낸 인도의 제 1 항구도시 콜카타에는 영국 식민지의 영향으로, 많은 영국 사립학교들이 있는데, 학생들이 입은 교복들을 보며, 소속과 정체성을 드러내던 유니폼의 매력에 빠졌었단다. 이런 인식은 그녀가 글에서 쓰고 있는 책 표지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책 표지가 마치 강요된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을 촉각적으로 만지고 싶은 한 벌의 옷으로 직조한 것이 표지다. 작가는 옷이 사회적인 제2의 피부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녀의 문체에 훔뻑 빠진 이유일 것이다. 작가가 전집류를 가리켜 우아한 유니폼이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난 여전히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컬러별 보색으로 맞추어 배열한다. 한길사의 그레이트북스는 서재에 꽂혀있는 백색의 밀도와 육중함이 좋아서 산다.
사실 표지의 아름다움 때문에 책을 고르게 된 경험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북 아트란 장르가 괜히 있지 않으며, 서양에서 책이 귀하던 중세, 책 표지를 장식하던 각종 보석을 이용한 바인딩 기술은 예술작품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책 표지 선정을 둘러싼 각종 관행, 표지를 잘못 골랐을 때 듣는 비난은 우리가 옷을 고르고 스타일링할 때, 겪는 풍경과 맞닿아있다. 그래서일까? 본질을 둘러싼 모든 표면을 한 벌의 옷으로 비유하며 사유하는 내게 그녀의 글은 살갑게 와닿는다. '그래 그래 이거야, 내 말이' 하면서 한 줄 한 줄을 소리내어 읽었다. 작가가 선별한 단어를 발화할 때 입 안에서 덥혀진 따스한 어휘들이 몽글거렸다.
내용에 걸맞은 표지는 내 말이 세상을 걸어가는 동안, 독자들과 만나러 가는 동안 내 말을 감싸주는 우아하고 따뜻하며 예쁜 외투 같다. 잘못된 표지는 거추장스럽고 숨막히는 옷이다. 아니면 너무 작아 몸에 맞지 않는 스웨터다. 아름다운 표지는 기쁨을 준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해주는 느낌이다. 보기 흉한 표지는 날 싫어하는 적 같다.
그녀의 책 표지에 대한 단상을 읽고 있자니, 패션 스타일링의 철학을 가르치는 내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싶어, 밑줄을 긋게 된다. 나도 그녀처럼 미술작가 조르지오 모란디의 적요한 정물화를 사랑한다. 통하는게 있었나보다. 필자도 <샤넬 미술관에 가다> 개정판을 내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인 버네사 벨이 그린 울프의 초상화로 글 한꼭지를 썼었다. 두 사람이 해낸 멋진 북커버 작업을 줌파 라히리의 책을 통해 확인해봤다. 한 시대의 외피를 뚫는 생각은, 그 말에 입힐 옷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옷장 속 인문학>이 5개국에 번역된다. 줌파 라히리의 말처럼, 국내에서 디자인한 표지가 그대로 외국에 옮겨지는 일은 없다. 세상의 모든 패션만큼, 표지도 현지의 정서, 미감, 독자층이 수용하고 접근하기 쉬운 디자인으로 변용되기 때문이리라. 오늘 하루 줌파 라히리의 이 한 권의 책 덕분에 오후 한 나절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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