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좋은 전시를 봤다. 강의를 핑계대고 갔던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내가 사는 피부>전. 정치색을 띤다는 말같잖은 이유를 들어 도록 판매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던 전시였다. 아무리봐도 정치색은 없다. 기획자인 큐레이터가 서문에서 브랙시트나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에서 볼 수 있는 백인우월, 인종주의 같은 단어들을 적어 놓은 정도가 전부다. 아마도 피부에 자주 보형물과 주사를 맞아야 했던 전임 대통령에 대한 이름을 거론한게 불편했다고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우리는 대통령을 가졌던게 아니라, 대통령의 옷과 사회적 피부를 육안으로 보면서, 상징화된 그러나 그릇된 한 인간의 형상을 내면화하며 지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피부는 그저 단순한 외부와의 경계와 보호막의 수준을 넘어선다. 인체 내부로 물이 침투하는 것을 막고 체온을 조절해주며 해로운 박테리아가 인체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침입한 박테리아를 죽인다. 피부는 접촉에 민감하기 대문에 사람이 주변 세상과 접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간자가 한자로 사이의 뜻을 의미한다면,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첫 인터페이스는 바로 피부인 셈이다. 사람의 피부는 촉각, 압각, 통각, 냉각, 온각의 다섯 가지를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이 피부가 뇌처럼 감각정보를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자신의 상태를 모니터하고 유기적 상태가 되면 원래대로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패션은 제2의 피부이자, 사회적 외피다. 정혜경 작가의 <완벽한 껍데기>란 제목의 거대한 옷이 전시장 입구에 걸려있다. 자세히보니 스테인리스와 종이 영수증을 결합해 만들었다. 인간의 쇼핑은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고 조합하는 첫번째 시도다.
사물을 구매하고 내 생의 한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일부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은 징표로 남은 영수증으로 만든 드레스는 사회적 피부이자 또 다른 자아를 조각하는 인간을 은유한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은 수시로 의사를 불러 피부에 주입물을 넣었다. 노화를 막기 위한 그녀의 열기와 노력 때문에, 한 쪽에서는 유기된 수많은 아이들이 물 속에서 수장되어야 했고 주요한 국가현안은 뒤로 내쳐졌다.
국민들의 뜨거운 촛불염원은 결국 권좌에서 그녀를 끌어내렸다. 보수란 이름을 참칭하는 자들은 이에 침묵한다. 저들은 '자신은 뽑지 않았다'라거나 '그만큼 창피를 주었으면 된거 아닌가'란 식으로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민낯을 볼 때마다 왜 고래로 피부를 벗기는 형을 가장 강력한 형태의 처벌로 삼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사실은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잠잠하기를 기다릴 뿐. 자신의 죄악과 자신의 그릇된 결정이 빚어낸 세계를 응시할 능력도 없으며 그럴 의지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상처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자들이다. 전임 대통령의 피부도 그랬다. 통각을 잃어버렸다. 너무많은 보형물과 주사로 물질을 넣은 탓이다.
어차피 누군가의 상처, 사회적 소외와 슬픔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익히지 못하며 살아온 인생이긴 했지만 그녀의 둔탁해진 피부 또한 이런 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보톡스를 너무 자주 맞게 되면 피부의 감각들이 상실된다. 타인의 표정, 감각, 그 속에 숨은 미세한 감정들을 읽어내는데 악영향을 미친다는 최근의 과학적 결과가 나왔다.
프랑스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오를랑은 이 성형수술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자신의 성형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고발한 작가였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꾸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남성들의 욕망과 응시를 담아내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우리는 사회적 옷, 피부라는 외피를 장식하고 보호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작가 장숙은 할머니의 반신상과 함께 입과 성기, 두 구멍을 확대한 사진을 전시실 중앙에 세웠다. 육체의 탄생과 죽음이 모두 이뤄지는 두 개의 구멍에서 인간의 생과 사를 수렴하는 장소성에 대한 은유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의 삶은 다양한 피부와의 접촉, 맞닿음을 통해 이뤄진다. 최근의 모든 디지털 기기들이 스킨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게임의 캐릭터나 그 흔한 스마트폰의 보호외막을 말할 때도 우리는 스킨이란 표현을 쓴다. 이번 전시는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부에 대한 개념, 그 외연의 확장을 조금씩이라도 맛볼 수 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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