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 사진을 읽는 시간
사진작가 앙드레 케르테츠의 전시회 오프닝에 다녀왔다. 이날 하늘과 바람, 거리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실루엣과 리듬이 케르테츠의 사진 속 풍경들과 하나로 맞물렸다. 여름 특별전답게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전시보다 사진 작품수도 많았다. 앙드레 케르테츠 Andres Kertesz(1894-1985)는 70여년을 사진기를 들었다.
폴란드의 부다페스트, 파리, 뉴욕을 옮겨 다니며 세상을, 사물을, 그 섬세한 이면의 세계를 포착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보면 요즘 우리들이 찍어 올리는 인스타그램 사진 같다는 생각도 많이 해본다. 그만큼 사진이란 매체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일종의 철학이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을 통해 일기를 쓰듯, 일상을 기록하고, 솔직하게 감성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들을 보며, 사진을 '사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우리가 인공지능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됨'의 마지막 보루나 혹은 우리를 구성하는 '환원불가능한' 인간의 미덕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런 질문들은 머리 아프지만, 현재 우리자신의 좌표값을 되새겨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세상은 어찌보면 '세상'이란 대상을 바꾸겠다고 공언하는 이들이 아닌, 그 배후에서 '하루'를 구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염원이 만든 세상이다.
예술이란 미명하에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매여있는 시선을 보이면서, 자신들의 철학에 동조하지 않을 때, 언어적인 공격을 가하는 이들을 상당수 봐왔다. 항상 자신들의 앞서고 있고, 진보라는 캐캐묵은 신념에 빠진 자들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하는 것 같다. 특정 이념이 먼저 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꼭 그럴까? 세상은 그 속에 살아가는 집단들이 구하는 '하루'의 몫만큼 성장한다.
이데올로기를 표방하지 않아도, 내면에서 숙성되고 있는 삶의 가치들은 표면에 드러나고, 새로운 얼굴을 하고 우리들에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상을 누구나 쉽게 기록하고 남길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사진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믿는 이들은 없다.
그들이 남기는 기록 하나하나가 우리삶의 빅 데이터가 되어가는 요즘이다. 거대한 뿌리의 작은 원자들처럼. 케르테츠가 찍었던 영화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초상사진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영상공부를 한 탓에 그의 몽타주 이론은 항상 기억 속에 박혀있다. 우리의 일상은 놀랍게도 가장 진부한 듯 보이지만 가장 강렬한 '현재'라는 모자이크로 채색된 한 장의 그림과 같다.
난 요즘 더 이상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한때 기종자랑이라도 하듯, 요즘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말이다. 패션잡지 보그의 표지도 이제는 아이폰으로 찍어서 올려지는 시대다.
물론 이런 시대에도 사진은 여전히 자신이 포착한 그 무엇을 통해 '시대'와 통어한다. 소통을 위해 언어를 정제해야 하듯, 우리들이 피사체를 고르는 것도 점차 세련되어 진다. 난 이런 시각적 진화의 과정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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