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인스퍼레이션

옷은 어떤 꿈을 꿀까요?

패션 큐레이터 2017. 7. 3. 12:55



에드가 드가 

<다림질 하는 여인>  1887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폴 멜런 컬렉션 소장 


햇살 아래 옷을 말리다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어떤 지역은 호우주의보가 내리기도 했지요. 가물었던 포도위엔 물길이 나고, 어떤 곳은 넘쳐 흘러서 피해가 속출하기도 합니다. 햇살의 마른 입자만 보다가 오늘은, 한껏 내린 비 때문인지 정오를 넘어가는 이 시간, 사선으로 내리꽂는 빛살무늬의 밀도가 강합니다. 이런 날엔 서둘러서 빨래를 마친 후, 너른 햇살에 말리는 게 제격입니다. 지난 주말, 저는 한 권의 소설집을 읽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정임이란 작가의 <손잡고 허밍>이란 작품집이에요. 저는 옷과 관련된 모티브, 혹은 은유나 이야기를 채집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특강을 갔다가, 강의 준비하며 우연하게 잡은 책이었습니다. 


미세한 생의 한 순간을 스냅사진처럼, 탄력있게 묘사하는 작품,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요즘『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한국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던지고 있죠. 이 소설 속 주인공과 비슷한 동년배의 삶을 살았을(작가는 81년생) 작가의 눈에 담긴, 주변부의 풍경은 82년생 김지영에서 다루는 세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루하고 닫힌 사회 앞에서 지리멸렬하는 세대의 감각적 그리움이랄까요? 저는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옷들이 꾸는 꿈>이란 단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소설은 세탁소란 도시의 한 위상점을 소재로 합니다. 빛의 포화를 견디지 못할 만큼 강한 햇살이 밀려오는 한 여름의 무료한 색감과 세탁소에서 주인들을 기다리는 '옷'의 색감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세탁소라는 숲을 거닐며 


다리미 보일러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에 몸이 매일 익어날 것 같은 세탁소의 일상 속에서, 여자 주인공은 「머리 위로 가게를 가득 메운 옷들은 열대림의 나무들처럼 지상의 열기를 빨아들여 아래로 자라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의 길이와 부피는 나무의 그것처럼 바뀐다, 엄마는 정원사처럼 매일 옷들을 돌보고 관리한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옷장을 정리하고 코트 따위의 겨울옷을 맡긴다. 엄마는 맡겨진 옷을 빨아 천장에 심어둔다. 천장에 심겨진 옷들은 여름에 가장 길게 자란다고 묘사한 세탁소의 풍경은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열대림의 풍경으로 변화합니다. 주인공의 밀도있는 관찰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저 멀리서 천장에 걸린 옷들의 주머니로, 소매로, 꾸물꾸물 멸치가 모여든다. 멸치들은 떼를 지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헤엄쳐 나간다. 옷의 비닐이 흔들리면 멸치들은 재빨리 헤엄쳐 가게의 보일러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으로 몸을 숨기고 밖으로 나간다. 멸치들은 등을 청색으로 배를 은백색으로 바꾸어 옷들의 피부를 흔들어댄다. 그것들이 펄떡거리며 지날 때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오랜 시간 고여 있던 느린 시간이 가게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옷들은 곧 바다가 된다」 저는 이 부분에서 작가의 묘사가 너무 좋아서 필사를 해두었습니다. 하루종일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가게를 지키며, 마치 폐소공포증이 닥칠 것 같은 이 공간에서 그녀는 바다를 꿈꿉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세탁물 포장에 쓰는 값싼 비닐에 투영되며 튕겨나올 때의 한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더라구요. 


옷들의 숲을 산책하는 시간 


세탁소란 정신의 열대림 속에서 주인공은 백일몽에 빠집니다. 대학생인 그녀는 방학 중이면 알바대신 엄마가 세탁물을 배달할 때 가게를 지켜주는 것 정도로 일상을 버텨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유년을 떠올렸나봅니다. "옷과 함께, 옷들을 기다리고 나를 기다려준" 엄마를 생각했겠지요. 동네라는 한정된 공간의 터잡은 곳이다보니, 옷을 빨리 찾아가는 이들과 계절이 바뀌어서야 뉘엿뉘엿 찾아가는 이들, 이 모든 이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도시라는 한 공간의 지점, 세탁소. 이곳은 그리움과 좌절, 엄마에 대한 냄새, 별로 바뀔 것 없는 닫힌 세계를 표상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 안에서 응찰해야 할, 온축된 동시대의 고통의 뿌리이자, 풍경임을 새삼스레 기억시킵니다. 


인간은 옷을 입고 사회 속으로 진입합니다. 이때 우리는 인간의 바다 위를, 걷거나 헤매거나, 유리되는 한 존재가 됩니다. 과거에야 옷이 인간의 바다를 좀 더 효과적으로 유영할 수 있는 힘을 주거나,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매개하거나 표시내는 기표였겠지만, 이제는 이런 기능도 조금씩 사그러져 가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이 인간의 몸을 감싸고, 외피와 내면을 동시에 투영하는 거울의 기능을 여전히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옷에 생겨난 작은 주름들부터 펴야 겠습니다. 해가 날 때 빨래부터 말려야겠지요. 빨래 걷으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