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터널-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초상화

패션 큐레이터 2016. 8. 9. 15:33



영화 <터널> 리뷰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초상화


어제 영화 <터널>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내 앞자리에는 존경하는 최승호 PD님이 계셨다.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초면이기도 했고 송구스럽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사회의 폐부에 카메라의 눈을 들이댔던 이에겐 어떻게 영화가 읽혀졌을지 궁금했다. 영화 <터널>은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의 초상화다. 압축파일을 하나씩 풀어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깔끔하다. 첫 장면은 기아자동차 딜러인 정수(하정우 분)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장면에서 부터 시작한다. 영화를 볼 이들은 이 장면을 주목하라. 영화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중층결집된 모순들을 조금씩 드러낸다.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데 인터넷에서 여야가 세월호 특조위 시간 연장문제를 묵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화는 터널에 갖힌 후, 구조대장의 말을 '한가닥 희망으로 삼으며' 고통을 견디는 한 남자의 분투기다. 사실 이 영화소식이 들리면서 사람들은 '세월호의 축소판'을 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이미 상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기대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끌린 이유를 알면,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하정우의 연기는 신파에 빠지기 보다, 웃음의 코드를 종종 절제해서 화면에 삽입한다.  튀지 않는다. 그가 갖힌 터널은 사회전체가 투명한 감옥과 같은 곳이라는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수인의 운명을 갖게 된다. 나오지 못한채, 그저 감옥에서 조금 더 편하게 즐길 수 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우리들의 삶은 딱 그 정도의 감수성에 머물게 된다. 



터널 밖 세계는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재난 매뉴얼은 없고, 구조에 필수적인 설계도면도 엉터리다. 그런 설계도면을 토대로 땅을 파본들, '이 길이 아닌가베'로 끝나지 않겠는가? 딱 지금의 우리다. 방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초적 취재만 좋아하는 언론, 재난이 불러일으킨 국가의 경제적 손실을 떠들어대는 관변 교수의 행태는 구조에 열을 올리는 현장대원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모든 잘못은 구조를 잘못 설계한 고위층이 아닌 현장의 문제일 뿐, 없는 이들끼리 책임을 물으며 싸운다. 생태와 경제논리는 항상 부딪히며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성찰은 쉽게 묵살된다. 부실시공으로 인한 터널 붕괴에 정작, 터널 붕괴에 가장 직접적인 가해자인 건설업자는 드러나지도 않는다. 하긴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아니던가. 


구조가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의 태도도 변화한다. 그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가치관은 너무나 쉽게 국가가 역설하는 경제적 관점에 영향을 받으며, 그렇게 다중은 국가의 '도덕적 공범자'가 되어간다. 국민들이 사건의 실체에 의문을 품거나 국가적 은폐기도에 저항하지 않는건, 이 내면적 공범의식 때문이 아닐까. '구조가 지속될수록 경제가 어렵다'라는 논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이들의 귀먹음을 영화의 첫 장면에 은유처럼 삽입한 이유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저 시의성에 기대거나, 세월호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트라우마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는데 있지 않다. 결국 재난영화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재난의 많은 요소들이 외부환경보다, 결국 우리 안의 모순과 부패로 인해 발생하며, 재난이란 어떻게 해쳐나가는가, 공조해서 처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부산함 속에 놓치고 있었던 참된 나,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를 재발견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재난에 반응하는 것은, 터널 속 정수 뿐만 아니라, 그의 모습을 화면을 통해 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재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상처가 깊어지고 장기화될수록 '밖'에서 보고 있던 우리들의 반응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한 사회의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말해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