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언어의 뿌리에 닿기-순례자의 길 위에서

패션 큐레이터 2016. 5. 12. 20:22



나에게 쓰는 서시

살아가는 날들이 후회롭지 않으려면,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로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시간의 유/무의미성을 구분하는 라틴어 크로노스/카이로스를 구분하는 기점은,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음을 깨닫는가의 유무입니다. 우리는 항상 근본과 소명, 나 자신에 대한 한계를 '파헤치며' 주어진 것들의 둘레를 계산하는 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언어의 뿌리에 내장된 '변화의 열매'를 언어의 껍질 밖으로 꺼내어, 인간에게 모종하는 사람입니다. 


애시당초 손쉬운 일이 없습니다만, 언어를 바루고, 언어의 내면을 자신과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시인의 과업은 이래서 힘겹습니다. 영화 <동주>를 봤습니다. 늦게서야 보고 이제서야 글을 올리니 송구합니다. 때늦은 반성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 동주는 우리의 시인 윤동주를 다룹니다. 그가 문청의 푸릇한 시절을 보낼 때, 그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정지용이나 백석의 시를 저도 참 좋아했답니다. 그저 좋아만했지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소설이나 평론, 혹은 드라마와 달리 가장 힘든 글쓰기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시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심이라 부르는 것들은 비단 한 편의 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시학이라고 했습니다. 옷도 그 중 하나겠지요. 윤동주의 시를 학교에서 배웠던 것 같은데, 영상과 함께 배우의 낭독으로 듣는 시는, 그 언어 하나하나가 마음을 찔렀습니다. <참회록>이 이렇게 가슴 한 켠을 아프게 할 지 몰랐습니다. 내 영혼의 거울은 얼마나 녹이 끼었을까? 성찰의 기능이니 여백이니 모두 잃어버리고, 그저 살아가다보니, 살아내게 되는 관습의 힘 앞에 굴복하고 사는 건 아닌지. 그러고보니 펜과 종이를 들고 항상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빼곡하게 적고 정리해보며 혼자 킬킬거리던 여유도 요즘은 없더라구요. 길을 걸을 때,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단어들, 생각의 타래들을 요즘은 도통 정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가슴 한켠이 아렸나 봅니다. 그가 살아낸 칼의 시대, 여린 언어로 저항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을 성찰하고 바라본 시인의 초상이, 유독 눈에 선합니다. 오늘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