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내 정영양 자수 박물관에 들렀다. 정영양 관장님이 오랜만에 미국에서 오신탓에 귀국 전 한번 뵐 요량이었다. 언제 뵈어도 장인의 면모가 넘치는 분이다. 여성이란 몸안에 갖힌 정말 강인한 영혼이 느껴지는 분. 패션 컬렉터로 수많은 옷과 유물들을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거둬들이며, 동아시아 복식 분야에선 최고의 반열에 서신 분이다. 내겐 어머니 같은 분이고, 멘토이기도 한 분. 이번 숙대에서 열린 <천자만홍을 짓다> 전시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섬유 컬렉션을 현대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역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천자만홍의 직물을 만나는 전시다. 천자만홍이란 울긋불긋하게 피어있는 여러가지 꽃의 빛깔을 의미한다. 그만큼 옛것과 현대가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패션의 해석이 다양한 겹의 의미와 빛깔을 가진다는 뜻이리라.
기계생산이 패션산업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시대지만, 현대에 들어와 많은 소비자들이 디자이너나 브랜드와 함께 제품생산에 동참하는 비율이 커지고, 핸드크레프트라는 미학의 가치를 스스로 조립과정에 도입하기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 그만큼 수공예란 과정이, 인간이 노동을 통해 만드는 산물에 대해, 스스로의 자주적 통제와 장인의식적인 동참을 통해 '나 자신을 만드는 행위'로 연결하려는 소비자가 들었다는 뜻이다.
정영양 자수박물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이 그저 자수작품들을 모아놓은 대학 박물관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내부를 보면 깊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자수란 하나의 장식기술을 통해, 이것이 적용된 동서의 모든 복식들과 유물을 컬렉션함으로써 복식의 비교연구가 가능하도록 한 곳이다. 비교연구가 다문화 시대의 새로운 미학적 발견을 위한 전초기지와 담론으로 부상하는 지금, 정영양 자수 박물관의 가치는 그 자체로 높다고 하겠다.
중국의 묘족 예복에 드러난 고색창연함, 아름다움을 신소재인 타이벡을 이용해 해석한 조예영의 <More Than>은 인상적이었다. 원단 자체를 빈티지 느낌이 나도록 원단을 지져서 군데군데 구멍을 내고 작품 전면에 은사와 동사를 이용, 묘족 예복에 대한 특성을 잘 짚어내 적용했다.
중국의 양면부채며 그 표면의 디자인들을 보면 지금도 적용가능한 디자인의 요소들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전시에서 사실 내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은 멕시코의 섬유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빚어진 작품들이다. 평생 동아시아의 섬유 예술을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우리의 유물은 어떤 상상력을 촉발시켰을까?
멕시코 치아파스 산 크리스토발데 라스 카사스에 위치한 Centro de Texiles del Mundo Maya 박물관과 연계 치아파스 지역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기하학적 문양을 선호하는 멕시코 인들에게 우리의 선은 어떻게 결합될까? 치아파스 지역의 장인인 마사 루이즈 로페즈의 작품은 조선시대 쌍학흉배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전체적인 흉배는 그대로 재현했지만 재료와 색상은 멕시코적 분위기를 따라 만든 탓에, 마치 유럽의 야수파 작품들처럼, 작품 표면에는 그래픽적인 느낌이 더해지면서 매력을 더한다.분홍과 다홍색, 보라와 파랑색은 멕시코 전통의상의 주요 색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전통 흉배를 재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검은 새는 우리의 학 문양을 만든 것이다. 검은 새는 멕시코에서는 착용하는 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흉배의 의미를 멕시코적 현지의 논리와 결합시킨 예다.
나는 패션을 통해 세계사를 공부해왔다. 옷이라는 사물, 옷을 장식하는 다양한 기법과 색채의식, 실루엣, 선의 의미들 이 모든 것들이 오늘날, 내가 각 나라의 민속복식과 현대패션을 연결하여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왔다. 한 벌의 옷은 한 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견고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내년부터 다양한 패션전시 기획을 위해 부산하게 뛰고 있다. 기획서도 썼고, 통과도 했다. 나는 솔직히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열리는 패션전시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그대로 수입해서, 국내 작가 콜라보레이션 몇개 곁들여서 내놓는 식의 안온한 방식들, 아니면 그저 자신들이 패션계의 무슨 위인이라도 되는 듯, 자기 자신을 브랜딩하기 위해 수억의 돈을 들여 하는 원로들의 개인전시들은 솔직히 문제가 많다. 작아도 개념과 큐레이션의 묘미가 살아있는 전시를 해보고 싶다. 요즘은 큐레이터란 자들이 너무 많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게 두려운 건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물질화해서 보여줄 자신이 없는 건지, 이런 딜레마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대다.
'Art & Fashion > 패션 인스퍼레이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 유럽 패션의 또 다른 DNA를 찾아서 (0) | 2016.11.22 |
---|---|
패션과 책은 어떻게 만나는가-소니아 리키엘 스토어에서 (0) | 2016.11.07 |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사랑하면 보이게 되는 것들 (0) | 2016.11.01 |
웨어러블을 조형하는 법-결국 우리의 삶이 말해줄거야 (0) | 2016.10.17 |
패션과 텍스타일을 위한 디지털 시대의 비전 (0) | 2016.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