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 인스퍼레이션

KIAF 2016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패션 큐레이터 2016. 10. 14. 01:13



한 시대의 미술문화는 시각문화를 견인하는 힘이다. 동시대의 미술을 즐겨본다. 나는 오랜 시간을 투영시켜가며 그림을 묵상하고 사유가 표면과 부딪히며 되튕겨낸 생각들을 곰삭여본다. 그림을 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산책이다. 철학자들이 습관적으로 걷기행위를 통해 하나의 사유에 접근하듯, 사실 그림을 보기 위해 다양한 벽면 위에 걸린 작품들을 하나씩 복기하는 것도, 정신의 산책과 다름이 없다. 이번 키아프도 꽤 오랜 시간을 거닐며, 그림의 숲 사이를 거닐었다. 경제불황과 더불어 미술시장도 꽁꽁 얼어붙긴 했지만, 그래도 부스들을 다닐 때마다, 주요 작가들의 작품에, SOLD 표시의 붉은 스티커를 볼 때면 마음이 한켠 가벼워진다. 일반인 VIP 시사 첫날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 탓에, 천천히 그림들 사이를 걸을 수 있었다. 하태임 작가님의 작업 부스 앞에서 한 동안을 서성였고, 정신의 본질이 묻어나는 한 획의 행위엔 마치 가슴속에 몽그리고 있는 내면의 색들이 추출되어 나타난다. 좋은 작가들을 만나고, 미술시장의 관계자들도 만나게 된다. 



이날은 평론과 전시기획을 하시는 김노암 선생님과 함께 간 터라, 나 또한 많은 분들과 인사할 기회도 생겼고, 좋은 설명과 말씀도 많이 들었다. 풍족한 하루가 되었다. 사라지는 도시의 한 풍경들을 따스한 온기와 함께 표현하는 정영주 작가의 작업이 작년에 이어, 내 눈에 들어온다. 장소애를 뜻하는 토포필리아를 화폭에 담아낸다. 우리는 한 장소에서 태어나 자라고 사랑하며 또 재생산을 하며 땅의 무늬위에 우리의 정체성을 입힌다. 그래서 장소는 그저 물질적 한 공간의 의미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의 어떤 정신적 측면을 조형해내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들이 바스러질때, 우리의 내면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난 정영죽 작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이런 느낌이 좋다. 



독일 베를린 출신의 토르스텐 홀츠의 그림을 봤다.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능숙했던 작가라고 했다. 그가 그리는 초상화들은 색과 스케치가 촘촘하고 정교하게 엮어낸 정신의 초상화같다. 옷의 무늬들을 찬연하게 그리는 이들이 왠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수 없나보다. 



김용호 작가님이 포착해낸 섬세한 잎맥의 형상들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오랜만에 뵌 장승효 작가님, 언제나 밝고 환하다. 예전 성남아트센터에서 <현대미술 런웨이를 걷다>를 기획할 때,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와 짝을 이뤄서 참 멋진 작품을 보여주셨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은 맥시멀리즘이란 패션의 트렌드와도 잘 맞아떨어지는데, 공항이나 혹은 공공 장소의 화려한 배경막이 되어도 좋을 듯 싶다. 



디자인하우스와 에이루트가 협업하며 소개한 작가들이 좋다. 특히 윤종석 작가님의 초기작부터, 나는 그가 직물을 접어 무한대로 표현해내는 다양한 동물과 사물의 형상들이 좋았다. 이번에는 근작인 주름(PLI)의 소개와 함께 다른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랜만에 갤러리들을 다니다보니, 인사할 분들이 한두분이 아니었다. 워낙 육아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진 탓도 있고, 나 또한 꽤 오랜동안 갤러리들을 다니지 못했다. 내년부터는 작은 전시와 큰 전시 하나를 기획하고, 지속적으로 패션을 테마로 한 전시를 통해 대중들과 만날 생각이다. 그림은 항상 한 시대의 그리움을 응축해낸 사물이라고 했다. 한 장의 그림 앞에서 내가 놓쳐버린 것들, 서둘러서 잃어야 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캔버스 속 형상과 색채가, 그 선이 내 안의 그리움의 우물을 파낸다. 그렇다고 마냥 슬픔의 정서에 젖는 것은 아니다. 


미술작품들이 내게 새롭게 말해주는 메시지들을 경청하기도 바쁜 탓에, 바로 지금의 새로운 느낌들을 나는 저 즐겨보려고 노력한다. 유동적인 사회, 흔히 리퀴드 현대라 불리는 지금, 우리 모두는 한 줌의 물처럼 손에 완벽하게 쥐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그 물질은, 또 누군가의 손에 의해 포착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위한 질료가 되어줄 것이다. 미술이, 예술에 대한 감상과 사유가 여전히 이 액체같은 현대 속에서 탄탄하게 우리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한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