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남자들에게 한 장의 그림을 권함-20세기 전업주부의 죽음

패션 큐레이터 2016. 1. 12. 13:49



롤라 스카르피타 <20세기 전업주부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왜 여자만 전업주부가 되어야 하나

SBS 다큐 <여자의 전쟁>의 트위터 반응이 뜨겁다. 제목이 <엄마의 전쟁>인 이유는 뭘까? 그만큼 육아를 일방적인 여자의 몫으로 짐지우고, 여성에게 '전업주부'란 참 '이상한' 정체성의 표찰을 붙인 결과다. 우리사회의 치열하게 누적된 모순의 지점을 그린 탓에 시청자 반응도 극과 극으로 뜨겁다. 학업성취도와 사회 초기 진입상의 성취도는 여자가 높은데, 왜 결혼만 했다하면  여자들은 비정규직 알바가 될까? 결혼생활에서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에 대해, 다큐상의 남자들의 대응방식은 한심하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항상 가정에는 여자의 손길이 우선된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남자들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이 나라의 남자들이 부끄럽다. 가정을 돌보는게 여성의 보편적 특질이라 말하는 이도 있더라. 보편이란 이름 뒤에는 결국 '신화(잘못된 믿음의 총체)'로 굳어버린 성에 따른 역할분담 담론이 자리한다. 


전업주부는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는다

이런 남자들에게 권하는 한 편의 그림이 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중인 화가 롤라 스카르피타의 <20세기 전업주부의 죽음>이란 그림이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살바토레 카르타노 스카르피타는 저명한 로스엔젤레스 지역의 조각가다. LA의 증권거래소의 파사드 앞에 놓여진 그의 조각은 인기가 높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여배우 마를린 디트리히의 실물 조각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인 살바토레 스카르피타는 저명한 근대미술 딜러인 레오 카스텔리의 총애를 받는 작가였다. 또한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 작가들과 더불어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문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녀의 작업에 눈이 갔던 것은 20세기 가정주부의 죽음이라는 표제 때문이었다. 제목의 힘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누군가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다룬 작품들은 하나같이 신고전주의 시대의 명작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의 손 모양을 따온다. 혁명파의 수장이 자객의 칼을 맞고 죽는 모습을 서구는 이상하리만치 변형 및 재생산해낸다.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려다 죽어가는 지도자의 헌신을 그 속에 담으려고 애를 쓰면서.  


레이디 가가와 로버트 윌슨의 콜라보레이션, 마라의 죽음 

여자들의 독박, 남자들의 독립

레이디 가가의 모습도 어느 고전 회화속 주인공 못지않게 비장하다. 비장미와 숭고란 고전적 가치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태도에서 미는 태어난다. 마라가 왼손에 쥐고 있는 편지에 쓰여진 <나는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의 편이 될 것이다>를 생각해보라.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공화정의 꿈에 일조하리란 비장의 미가 담겨있다. 20세기 마지막 전업주부도 브릴로 세제를 뒤로 하고 손에 자신의 빨래감을 쥐고 죽어간다. 한 마디로 티나지 않고 덕이 안되고 돌아올게 없는 가사노동을, 왜 여성들이 떠맡게 되었을까? 무슨 세탁을 하다가 다 죽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런 20세기적 사고가 여성의 삶을 그림처럼 처연하게 죽일 수 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외국과 한국의 가사노동 분담실태를 보라, 놀라울 수준이지만, 네덜란드에 이민간 남편이 말하는 말투. 여기는 구조가 잘못되어 있어서 '남자들이 힘들다'라고 하더라. 그러면 한국처럼 여성이 독박을 쓰는 구조는 도덕적으로 좋은 구조인가? 칼퇴근을 사회 전체가 떠받들고 각자 성원에게 준 것은 서로가 책임져야 할 가정의 몫을 하라고 준게 아닌가 말이다. 사회적 합의란 이런 것이다. 남녀가 모두 가정생활에 필요한 노동력을 함께 공유하며 떠맡는 것. 우리네 남자들에겐 이게 안보인다. 여전히 남성들은 독립하기 위해 여성의 독박이 필요한 걸까? 


커리어를 접으라는 그대에게 

다큐에서는 교대근무로 바쁜 간호사의 사연을 다루었다. 그녀에게 교대근무를 관두라고 다그치는 시댁과 남편의 입장을 보여준다. 남편의 태도에 대해 분개하지만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이것이 가감없는 지금 이 땅의 남편들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러나 사실이 그렇기에 더 답답하다. 왜 아내는 항상 남편과 아이에게 몹쓸 엄마/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 두 존재의 공존을 바탕으로, 상호책임의 집을 짓는 일이건만, 유독 결혼과 더불어 자칭 '살림살이'라 불리는 허드렛일은 여성의 전폭적 몫으로 남아서, '독박'이란 표현이 쓰여야 하는게 옳은가?. 여성 일방의 가사에 투여하는 헌신의 시간이 모성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 왜 남성들에게는 '가사와 육아를 맡기 위해 회사를 관두라는 말을 하지 않는가? 여전한 현실이었다. 


여전히 유아기인 너에게, 이유식을 권함
일상화된 가부장적 체제와 누적되어 굳어버린 사회적 환경과 사고를 무기삼아, 사회적 핸디캡을 가진 여성을 스스로 잘나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을 것이다. 아내의 가사노동없이는 일상의 재구성이 불가한 사회적 금치산자, 무능한 남자들이 한국사회에 이렇게 많다는 게 놀랍다.. 칼퇴근이 이뤄진다고 해결될까? 어렸을때부터, 갖잖은 성적역할의 구분에 젖었고 젠더란 관점을 접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입장바꿔 생각해보자며, 허리띠를 하나로 묶어 하루의 일상을 지내게 하면 해결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은 여자의 희생을 '자기화'해본 적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자기화란 쉬운게 아니다. 끊임없이 훈련하고 익혀서 몸에 새기는 것이다. 한국남성들은 사회구조 내에서 이런 습속을 들이질 못했다. 그런 자신들을 당연하다고 착각하며 믿는 것일 뿐이고. 그들은 무의식 중에 남성/여성의 견고한 이분법을 배웠을것이다. 역할경계가 깨어지고 여성들의 사회적 삶이 태동하는 지금에도 모성신화를 '보편적 특질'이란 이름으로 변호한다. 항상 여성에게만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와 미덕을 논한다. 


제 부모에 대한 효도는 네가 해라

자기화 해본 적이 없으니,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을 스스로 풀지 못한다.  '장가를 가면 철이든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 난 불쾌하다. '남자는 장가를 가야 효도를 하는 법이다'라는 식의 발언은 더 불쾌하다. 이 말에는 항상 동일한 부모가 되어봄으로서 부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보다, 며느리의 노동을 통해 부모에 대한 효도를 대행한다는 논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부모에 대한 효도는 본인이 하는 것이다. 제 손가락으론 당췌 할 줄 아는게 없다. 아주 유아기의 인간유형들이다. 부끄러운줄 알라. 결혼은 분명 선택이 맞다. 그런데 그 선택은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선택이 여성이감내해야할 굴레나, 혹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희생을 담보하는 당연한 체계인양 떠들어서는 안된다. 남자들만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가정부양의 책임이 남성주체들에 많이 놓여져 있다는 걸 누가 모르나? 맞벌이가 대세가 되고, 여성들 또한 노동시장에 던져지는 때, 입으로는 진보입네, 아내를 돕네 하면서도 여전히 통계상으로 선연하게 드러나는 저 시간의 격차들을, 어떻게 설명할것인다? 한국남성들은 정말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가?  요즘은 육아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는 아빠들도 많던데, 다큐에 나오는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유독 전형적인 사람들만 데려다 놓은 듯한 느낌이다.  '단전'에서 부터 화가 확 끓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