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을 미술관 내부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작품들을 눈에 담고 생각하고, 도록에 쓰여진 텍스트 하나하나를 몽글몽글 입 안에서 굴려보고 맛보며 보았던 전시. 글로벌리즘의 시대라고 하지만 현대미술담론에서 과연 여성미술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까를 조망한 전시다. 무엇보다 여자의 삶, 그 조건에 대한 질문과 응답이리라. 19세기말을 근대사회 발전과 더불어 태동하게 된 여성주의, 페미니즘은 현대의 다양한 담론 중에 그래도 꽤 유익하고 생산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껏 역사의 주역으로 살아내며 각종 담론을 만들어낸 남자들이 보지 못하고, 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문제삼기 때문이었다.
치하루 시오타의 작업은 압도적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작가로 자리매김한 치하루 시오타는 원래 침대, 옷, 옷장, 구두 등 여성과 관련된 오브제들을 가지고 대형 설치작업들을 주로 했다. 여성들의 일용품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비정형의 실타래 구조를 만들어, 그 속에 배치시킨다. 이번 시립미술관에 출품한 작품은 신부와 순결을 상징하는 흰 드레스 5벌과 이를 엮고 있는 줄망이다. 제목은 <꿈의 이후>다. 웨딩 드레스같긴 한데 명쾌하게 규정하지는 않는다. 결혼이란 맥락만이 여성들이 경험해야 하는 사회의 복잡다단한 거미줄 같은 폭력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멜라티 수료다모의 작업도 놀라왔다. 숯을 태워 만드는 과정, 그 위에 놓여진 가재도구는 지금껏 여성들이 삭혀야 할 삶의 반증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집의 유령>이란 이 작품 앞에서 한 동안을 서성거렸다. 12시간 동안 전시장 앞에서 200킬로그램이 넘는 숯을 태웠다. 나무는 장작이 되고, 그 장작은 숯이 되고, 다시 숯은 먼지가 된다. 각각의 기능에 따라 형질이 변할 때, 항상 새로운 에너지가 발산된다.
위에 보이는 작품은 린 티얀미야오 작가의 작품이다 원제는 More or less the Same.
실제와 가짜 뼈를 망치, 식칼, 절다닉 등과 같은 일상의 오브제와 결합시킨 후 은실로 감아 새로운 형태의 조각품으로 만들었다. 잠사문화가 시작된 중국에서 실크가 갖는 문화경제학적 의미는 크다. 수만년의 시간동안 항상 옷을 해서 입힌 것은 여성이지만, 한번도 그들의 노동과 그들이 꽃피운 문화에 대해서는 남성 문화는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의 침선문화를 비롯, 동아시아 여성들의 노역이 다 그랬다. 실을 이용해 감고 풀고 하는 반복적 행위, 그 행위를 통해 한 벌의 옷이 만들어져왔다는 것을 남자들은 모른 것이다. 고단한 여성의 삶을 독특한 예술로 전환시켰다. 가장 눈에 띠는 작품이었다.
인도 출신의 작가 쉴라 고우다의 작품도 눈여겨볼 만 했다. 실과 천을 이용해 수공예적 가치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은데 인도 내부의 종교와 지역 갈등을 겪은 과정에 대해 타피스트리로 표현한 것이다. 걸개 작품에 빨갛게 점이 찍혀있는 것 같은 부분은 유혈사태가 났던 곳을 상징한다고 한다.
페미니즘이란 담론과 미술에 대해 꽤 깊게 다룬 전시를 오랜만에 본 듯 싶다. 무엇보다 내겐 실과 천, 텍스타일과 같이 여성예술의 주요 소재로 불린 재료들을 통해 담론의 한 부분을 설명해내고 재현하는 작가들의 손길이 놀라왔다. 우리는 항상 남과 여,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이항대립적 세계를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런 체계가 쉽게 무너질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건 이렇게 작위적으로 나뉘어진 세계 속에서 우리 서로가 항상 통합이 아닌 '분리'가 가져다주는 정서를 경험하고 산다는 것일 것이다. 미술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세련되게 조탁해내고,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그 경험의 이야기에 여성만이 아닌 다른 타자들을 초대할 때, 우리를 둘러싼 이 분리의 체계, 세상에 균열을 낼 수 있겠지. 적어도 미술은 그런 능력을 보여주어야만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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