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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시처럼 살기 위하여-알레산드로 맨디니 전

패션 큐레이터 2015. 11. 5. 07:47



알레산드로 맨디니 전에 다녀왔다. 그 유명한 프루스트의 의자도 보았다. 1976년 이후 반 디자인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의 조종 같은 오브제다. 



과할 정도의 색채와 조각들의 모음, 프루스트 의자. 이 의자가 디자인의 역사에 불러일으킨 바람은 엄청났다. 리 디자인, 혹은 대항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한 시대를 전시를 통해 보게 된 것이다. 바로 알레산드로 맨디니란 디자이너의 전 작업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과 교양의 시간이었다. 맨디니 전시를 통해 결국 배우게 되는 건 디자인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그 질문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일거다. 



디자인은 인간과 사물의 대면에서 출발한다. 사물을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이 그 사물을 기능적 필요성으로 보는지, 혹은 감성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미학적 측면으로 해석을 하든지, 혹은 사물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물음으로써 존재론의 언어로 디자인 과정을 풀어내는 것이다. 결국 디자이너는 사물을 통해, 그 사물을 설계하고 장식하는 과정에서 한 사회가 제공하는 기술, 사회적 미감, 질료로서의 재료미학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한 시대의 감성을 풀어낸다. 



아마도 이 작품이 맨디니의 대항적 디자인의 시작 혹은 그 철학을 가장 잘 말해주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참 기능적으로 보이는 의자가 모든 만물 위에서 독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960년대 이전, 디자인은 기능이란 측면에서 모든 사물의 측면을 풀었다. 심지어는 이 기능주의는 사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사물과 관계 맺으며 그 정서를 풀어내는 방식이 인간의 인지방식, 혹은 장식욕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108번뇌 의자란다......그렇게까지 와닿진 않았다.



사물을 확대하거나 축소함으로써 사물에 감추어진 비의를 찾는 일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디자인 철학의 한 핵심을 보기보단, 즐거움을 주는 오브제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저 동심의 측면을 보니, 디자인은 일단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976년 반 디자인 운동과 같은 디자인 활동에 가담한 몇몇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건축가 게리에로가 창립한 스튜디오 알시미아라는 그룹에 동참했다. 여기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전후 이탈리아 최고의 전위 건축가 겸 디자이너들인 멘디니, 브란지, 소사스 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그룹은 현대사회에서의 문화와 자본의 관계를 테마로 다루는 '모도'라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재직하고 있는 맨디니에 의해 주도된다. 1979년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스튜디오 알시미아의 첫 전시회가 열렸고 멘디니는 이 전시회에서 바로 그 유명한 프루스트 의자를 내놓는다. 빅토리아 양식의 안락의자를 과장된 형태로 다시 디자인 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폭 시냑의 인상주의적 점묘법 회화기법을 이용해 이 의자를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왜 19세기 소설가 프루스트의 이름을 딴 의자를 만든 것일까? 미술사를 보면 프루스트가 인상주의 회화를 소유했다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근거해 막연히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적으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의자의 단순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정품에 기대어 그것이 가진 아우라와 역사를 패러디 하는 것이다. 현대의 포스트 모던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디자인의 역사에서 유독 이탈리아의 디자인은 영미권과 달리 정치적 체제, 사회변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후 파시즘의 붕괴와 더불어 맞은 민주화의 영향이 컸다. 디자인이란게 결국 소비행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이를 위해 굿 디자인이란 철학을 만들어내고 줄을 설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광폭함이 디자인에 영향을 미칠 때, 반드시 유발되는게 복제행위와 사회적 이념의 쇠퇴란 점일 거다. 디자인이란 소비를 위해 만들지만 결국 그 주체인 인간과 사회를 위한 매개이기에 그렇다. 



패션이라고 뭐 다를바가 있는가?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장식과 여인들의 굴곡진 몸을 만들기 위한 인위성은, 기능주의란 선물과 더불어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인간에겐 항상 장식본능이 있고, 이 본능은 패션에서 맥시멀리즘과 연결되어, 우리 안의 장식욕망을 드러낸다. 사실 이 전시를 보면서 시종일과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숙제는 인간에게 '허용되는 장식의 수준'에 대한 문제였다. 결혼할 때 와인따개를 맨디니의 디자인을 많이 사서 그런지 익숙하기도 하고. 인생을 시처럼 살기 위해선 결국 우리가 소비하고 쓰고 먹고 노는 모든 것들, 그 사물과의 관계가 시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전시를 통해 그런 생각 몇 가지를 건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싶다. 


전시장 중간 쯤이었나, 모도에 발표한 맨디니의 글이 너무 좋았다. 더 높은 차원을 위해 도전하고, 전통이 주는 안정성을 맛보고, 자신의 약점을 잊고, 확실한 가정을 타파하고, 본인의 근본을 넘어서는 일, 무엇보다 프로젝트를 통해 삶에게 증언하라는 말이 와 닿는다. 생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증언이다. 작고 무작위적인 것들을 취하고, 가이드 라인을 찾지 말며, 농축시키되 확장하라는 디자이너의 말. 한 편의 멋진 시였다. 작업이나 창작을 위한 원칙이기도 했고. 힘나는 문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