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패션위크가 이제 마무리된다. 진태옥 선생님의 50주년 기념전시에 다녀왔다. 부산한 런웨이 장과는 달리, 전시회장은 고요하게 옷을 묵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시무대 구성은 파이프를 이용해, 마치 정신의 골조를 표현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수지 맨키스의 서문도 인상적이었다. 옷을 한 편의 시에 비유하는 일은, 내게도 익숙한 은유다. 언어로 집을 짓듯, 직물로 짓는 영혼의 집, 어찌보면 사찰에 가깝다. 언제부터인가 옷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기가 어려워졌지만, 난 그럼에도 이 표현의 힘을 믿는다. 옷은 한 시대의 시여야 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 옷과 서구의 이념을 결합시키려는 국내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있었다, 그 역사의 흔적을 진태옥의 옷을 통해 보고 왔다. 겹침과 펼침, 풀어해치는 신명, 무엇보다 백색을 무한변주할 때 토해내는 세미한 그림자를 옷의 재질과 결합시키는 디자이너의 손길은 놀랍다. 거친 데님,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세한 서구의 레이스를 포옹하는 우리내 신부의 활옷이 어우러진다. 미적 조응의 좋은 예다.
디테일이 놀랍다.
1980년대 이후 서구 패션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글로벌리즘이라는 문화현상이 확산되면서 에스닉 룩이라는 장르가 부각되었다.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파리패션계에 도전했다.
민속복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민속복식의 조형적 특질과 미학적 콘텐츠를 조화시켜 서구가 좋아할만한 새로움의 코드와 이국적 취향을 결합시켰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한국패션계의 원로로서, 50년의 긴 세월을 한국패션의 부흥과 성장에 몸을 바쳤다. 오간자를 이용해 만든 드레스들을 보자니 직물이 춤을 추는 것 같다.
무엇보다 백색 셔츠는 마치 내부에 수만개의 다른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무한 변주를 해내는 디자이너의 섬세한 손길이 놀랍기만 했다. 진태옥 디자이너만큼 한국적 영혼의 얼개를 옷으로 잘 드러낸 디자이너도 없다. 이질적인 소재를 결합시키는 디자이너의 균형감각은 놀랍고 혁신적이다. 한복 치마의 변형과 린넨과 실크를 만나게 하며 옷 자체를 서구적 이념상인 '닫힌체계'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패션전시란 형식이 역동적인 런웨이에 비해, 무기교와 비움의 시간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모델이 걷고 움직이며 관객이 환호하는 런웨이와 달리, 전시는 그만큼 내면의 속살을 천천히 그 빛깔과 실루엣을 내 눈에 투명해질 때까지 읽어야 한다.
한 시대의 디자인은, 그것이 산출된 사회적 조건과 맞물려 있고, 디자이너들의 혁신도 딱 그 시대의 코드와 맞물리기에. 진태옥 선생님의 혁신적 시도도, 그 세대의 몫이다. 우리는 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하고, 변화된 맥락 아래서, 또 새로운 혁신을 해야 한다. 그것이 후학과 후배들의 몫이자 의무다. 툭하면 한국적 패션을 규정하는 이전 미술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이란 문화지리적 실체에 대해 너무 소박함과 온화, 조응과 수동의 주체로 보이게끔 서술해온 것도 사실이다. 난 이런 식의 규정을 굳이 좋아하지 않는다.
미래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란 말이 있다. 하지만 미래로 가기 전에, 이미 우리 삶에 깊게 들어온 과거시제의 무대가 있다. 이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국적 패션이란 이름 하에, 지나칠 정도로 전통적 코드를 복제에 가까운 방식으로 차용해 온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는 영광을 돌리는 자리지만, 여기에 묶여서는 안된다. 한 시대의 혁신의 몫, 그 치열한 삶을 살아온 이에게 보내는 박수와 더불어, 참 힘든 시절, 온 몸으로 국가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뛰었던 세대에 대해 '기억'하자. 그 기억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날들에 대한 '선연한 찬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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