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앞에서 얼어붙다
대학원 특강에 앞서,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시립미술관으로 갔습니다. 서양현대미술의 한 핵을 이루는 하이퍼리얼리즘 회화와 조각을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거든요. 제목은 『숨쉬다-21C Hyperrealism』서울에서도 보지 못했던 전시라 기대가 컸습니다. 예전 뉴욕에 갔을 때, 갤러리들이 즐비한 거리들을 거닐며 컬렉션을 해보려고 판매 작품을 위주로 하는 곳들을 다닐 때마다 눈에 띠는 것들이 바로 극사실주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실제로 판매율이 좋았거든요.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니 마음이 들 뜰 수 밖에요. 게다가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만 모아놓았습니다.
하이퍼리얼리즘, 의미의 지형학
하이퍼리얼리즘이란 1960년대 후반, 뉴욕과 독일 등에서 일어난 새로운 미술사조입니다. 현실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현적 회화의 전통에 '극(Hyper)' 혹은 초과라는 의미의 접두어가 붙은 합성어입니다. 사실주의의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경향이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지요. 즉 하이퍼리얼리즘은 모더니즘 미술에 대응하여 발생한 것이며 아방가드르 미술의 변증법적 결과로서 개념미술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의 재현에 대한 전통적 방식도 거부한 이중 부정의 예술 경향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개념화에만 치우치거나 기존의 형식충동에만 사로잡혀 만들어진 예술작품에 대한 반대경향이라 보시면 좋겠네요. 하이퍼리얼리즘은 일상적 대상의 재현을 시도하되 전통적 회화방식이 아닌 사진적 방식으로 재현하려 했습니다.
당신의 고독이 낯설지 않다
회화가 사진이 될 수 없는 당연한 이유에서 그것은 제3의 회화방식이 됩니다. 결국 사진과 회화의 틈새를 파고들면서 '익명적 주관성'이라 부를 수 있는 모순적 의미구조를 조형적으로 실현시켰던 것이죠. 1965년-70년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하이퍼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극복하며 태동된 팝아트와의 연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적 비평, 즉 소비산업사회, 일상적 현실에 대한 비평적 논리를 생산해냈습니다. 극사실주의란 사진을 매개로 하는 시각의 한계를 넘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극사실적 묘사를 통해 현실 이상의의미를 부여하려는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사회속에 만들어냈습니다. 삶 속에 내재된 불안과 고독, 낯설음이 실제 인물과 동일한 조각과 회화를 통해 그대로 반영됩니다. 섬뜩함부터 느끼게 되요.
로빈 일리의 작품에선 커피샵에 들어오는 현대인들의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같아서 동감이 컸습니다. 그는 흔히 이미지 캐스팅이라 불리는 기법을 사용하여 작업합니다. 파편덩어리처럼 표현된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자아불안과 분열의 상황에 놓여진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영국출생의 이 작가는 무심한듯 감성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으로 우리들의 내면속에 자리한 일련의 감정들을 끄집어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마크 시잔이 전시장의 중간에 딱 자리를 잡고 있군요.
마크 시잔은 하이퍼리얼리즘 조각을 이끄는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 속에 드러나는 현대인의 모습은 무기력과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항상 충격적이고 현실에서 익숙하지 않은 이질적인 측면들을 드러내서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이중으로 그 현실을 돌파하고 껴안으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고대의 신체조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광폭한 세계 속에서의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엄을 찾을 것인가를 되묻는 작업을 하고 있지요. 이 작품의 이름은 포옹입니다. 누군가를 온 힘을 다해 껴안아 본 적이 언제인가 생각이 들더군요.
캐롤 퓨어맨의 작업을 보면 항상 유쾌합니다. 사실 제가 미술품 컬렉팅을 위해 뉴욕을 돌아다닐 때 한창 인기있는 작가가 이 사람이었어요. 모든 작품 앞에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표지를 붙여놓을 정도로 정교하게 사람의 조각을 만들지요. 특히 물 속에 작품을 설치하는 조각가로도 유명합니다. 회화만의 고유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출발한 극사실주의는 사실을 더욱 사실같이 보여주기에, 우리 안에 있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 성장에 대한 불안감을 비롯해 많은 사회적 병리현상과 그 속의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드러내기에 참 알맞은 사조라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각작품들을 볼 때마다 그저 남을 보는 것 같지 않은 생각에 빠지게 되요.
샘 징크스의 작품이 보이는군요.
작품이 피에타입니다. 피에타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을 총칭하는 말이지요. 호주 출신의 작가인 샘 징크스의 작품은 포스팅의 제일 첫번째 작품도 만들었어요. 그는 생의 단계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인간이 걸어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언제든 상처받기 쉬운 애처로운 인간의 단면들을 그려내는 일을 합니다. 피에타에서 안고 있는 것이 작가 자신이라고 하더라구요. 작가는 실리콘과 섬유유리, 수지, 탄산칼슘과 같은 재료를 통해 인간을 치밀하게 빚고 묘사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 수염 한 터럭, 노화되어가는 피부 속 푸른 혈관까지도 끈질기게 재현해내지요. 놀라움과 아름다움이 섞이는 지점에서, 그의 작품은 그렇게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마저 갖게 합니다.
다시 한번 좋은 작품 앞에서 서성거리고 맙니다. 제프 바텔의 유화작업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 거립니다. 올해 꼭 배워보겠다고 결심을 세워놓고선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던 첼로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제프 바텔은 악기를 연주하는 손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확대하여 그렸습니다. 음악가와 악기가 손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되는 현과 건반, 금속에 이르는 표면에 대한 연구를 깊게 그려냄으로써, 감성의 한 순간이 탄생하는 지점, 그 표면에서 만나는 손과 정신을 만나게 하려 합니다. 손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랄까?오트 쿠튀트를 비롯해 공예정신과 인간의 손의 힘을 믿는 저에겐액자에 그려진 악기를 연주하는 손은 그 자체로 강력한 환기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힘든 현실을 버텨내는 것도 결국 잃어버린 손길, 손의 힘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이번 전시의 부제는 '숨쉬다'입니다. 회화와 조각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사라진 인간 영혼에 대한 경이와 숭고를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부제를 붙였다고 합니다. 사진의 발명 이후로, 원본과 복사에 대한 개념의 경계선이 무너졌지요.문제는 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작은 경계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경계선도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외양을 가진 이들을 통해,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불편하게 마주해야 하는 생의 섬뜩함을 작품 속에서 읽어보게 되네요. 섬뜩함은 마냥 나쁜 감정같진 않습니다. 현실에 대한 노래를 부르려고 해도우선 그 현실이 토대하고 있는 껍질의 실제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테니까요.
전시를 보고 나오니 저녁기운이 완연합니다. 가을볕과 바람, 그 사이로 걷는 미술관 길이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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