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한국문학계, 가을 전어가 필요해

패션 큐레이터 2015. 6. 24. 06:01



이안 맨스키, 자위하는 남자,  2010년 


신경숙 표절로 문학계가 시끄럽다. 신경숙의 사과문은 갖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유체이탈화법의 문학버전이라는 비난도 샀다. 신경숙과 침묵의 카르텔을 비판하는 이들을 보며, 드는 느낌은 '네 작품도 감동없긴 매한가지'란 거였다. 물론 논의를 표절에 한정지어야 함에도 말 나온 김에 몇 가지 생각을 써볼까 한다. 문창과 출신으로 글 다듬는 기술만 연마한 비평자의 글이나 필사로 버텨온 신경숙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커서다. 


입으로는 문학계의 다양성을 이야기했지 현실은 참담했다. 다양한 이력의 작가들이 몇이나 되나? 손에 꼽을 정도다. 문학이 시대의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면서, 빅데이터와 혼종성이 시대의 중추가 되어가는 시대, 여기에 걸맞는 교육, 감성, 경험을 갖춘 작가들이 있나? 이런 작가들을 찾아내고, 육성하지 못한게 어느 한 집단의 문제는 아닐 터. 문학판을 배회하는 이들의 이력이, 문예창작을 비롯 국문과 사람들이 대다수란거다.


출판환경이 급속도로 와해되고 독자의 선호와 취향, 세계관은 바뀌어가건만, 당신들만 바뀌지 않았다. 당신들만 읽는 문예지나, 업적평가에 맞춰 졸속으로 쓰여진 논문이나 무슨 차이가 있나? 누구도 읽지 않는 것을 쓰는 이들. 그런데 당신들은 자신의 글이 '시대를 재현'하고 있다고 혼자서 정신승리한다. 문학이란 상품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플랫폼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캐캐묵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헌옷 같은 플랫폼에만 권위를 부여해왔다. 


문예지 문제는 가장 첫번째 혁신의 대상이다. 조직관리에서 제일 힘든게, 각 부서가 자신의 부서를 일종의 왕좌(Kingdom)으로 만드는 거다. 조직 내 패권주의를 깨기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 하는지 아는가? 문학계'란 문학도 사회전반의 체계처럼 '유기적인 연결체'들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일거다. 유기적 성질이 유지되려면 내부가 철저하게 혼종성과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이뤄져야 옳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문학계는 동종교배로 만들어진 열등종자들의 판이다. 문창과가 80퍼센트가 넘는다. 제발 정신의 자위질좀 그만하라. 자위만 하고 사정을 못하는 당신들은 누구인가?


자기계발서보다 안팔리는 문학책. 여전히 가장 큰 코너를 서점에서 차지한다. 미안한 줄 알라. 상황이 이런데 유효구매자들이 늘지 않는 건, 자칭 영혼의 피를 짜내 썼다는 당신들의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서다. 세상이 스낵컬쳐의 시대라서 진중한 문학이 설 길이 없다고 떠들지마라. 당신들이 말하는 진중함이란, 당신들의 자의적 기준에서의 진중함일 뿐. 시대는 더 이상 내면으로의 침잠, 신경숙 스타일의 자의식의 과잉이 점철된 산문이 차지할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전어, 집 나간 한국문학계에 필요한 건 지금껏 습관적으로 써온 당신들의 언어를 '전어' 하는 일일 것이다. 싹 뒤엎는 것. 하지만 과연 될까? 당신네들이 혁파해야 한다는 침묵의 카르텔 만큼이나, 당신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지금껏 써온 언어의 습관을 바꾸기가 쉽질 않을 것이다. 혁신이란 가죽의 단백질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그래야 동물의 피부가 인간을 위해, 내구성을 갖춘 사물이 된다. 지금 이 땅의 문학계에 진정한 단백질 구조가 바뀌는 경험. 가능할까? 여전히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