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을 읽는 밤, 희망의 무게는 가볍다
연극 <바냐와 미샤, 소냐와 스파이크>를 보고 왔습니다. 연극 리뷰를 꽤 오랜만에 써봅니다. 체홉을 좋아했고, 사실 푹 빠져 살았던 예전의 한 순간을 떠올릴 그런 제목의 연극을 발견한 탓에, 극장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안톤 체홉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독특한 작품 포스터를 보고 작가를 찾아봤습니다. 미국출신의 블랙코미디 작가인 크리스토퍼 듀랑입니다. 1949년생인 이 남자, 원래 80년대 보수우익의 정치가 판치던 시대, 자신만의 독특하고 냉소적인 대사들로 꽤나 인기를 끌었지요. 이후로 약간 시들하다가 이 <바냐와 미샤, 소냐와 스파이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2013년 토니상 수상을 시작으로 연극계의 걸출한 상들을 다 휩쓸었지요. 여주인공이 <에일리언>으로 유명한 시고니 위버였습니다. 듀랑은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예일 드라마 스쿨(개인적으로 젊은 날 가고 싶던 학교였죠)에서 연극학 석사를 했습니다. 현재 자료를 보니 지금은 줄리어드의 연극학 과정의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더군요.
바냐와 소냐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작품은 똑똑한 대학교수 부모님에게 안톤 체홉의 희곡에 등장하는 ‘바냐’와 ‘소냐’와 ‘마샤’라는 이름을 선물(?) 받은
세 남매와 범상치 않은 주변 인물들이 펼치는 ‘절망’적인
해프닝을 통해 오히려 ‘희망’을 이야기하며 삶의 통찰력을
선사하는 세련된 코미디 작품입니다. 체홉을 읽은 분들이라면 더욱 빠져들 듯 합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체홉에 대해 몰라도 흡입력있게 작품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지만, 사실 작품 속 바냐와 소냐, 마샤, 모두 체홉의 주요 작품 속 인물들을 교차시켜 놓은 듯하기 때문이죠. 연기 전공을 하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체홉의 <갈매기>나 <세 자매> 같은 작품들이 얼마나 익숙한가요? 모두 자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며 교수님 앞에서 받는 오디션 시간이 되면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마냥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는, 그러나 지루하기 그지 없는 중년의 백수 '바냐'와 조울중과 분노조절장애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노처녀 '소냐' 그리고 왕년의 섹시함을 자랑하던 여배우 '마샤' 이들은 남매입니다. 하루는 이 마샤가 끝내주게 젊은 애인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더이상 집을 건사할 수 없다며 팔아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죠. 이때부터 각자 안에 쌓여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집니다. 마샤를 따라 코스튬 파티에 가기로 한 바냐와 소냐, 그 안에서도 신경전을 벌이는 소냐와 마샤, 두 사람의 대화가 찰집니다.
무기력은 습관의 죄악을 먹고 산다
저는 특히 바냐 역에 빠졌습니다. 체홉의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바냐와 너무 닮았습니다. 그의 일상은 항상 상실과 괴로움, 삶에 대한 열망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상의 비루함으로 가득하죠. 어찌보면 우리들, 현대인의 삶을 예언이라도 하듯, 오래전 체홉은 바냐를 통해 관계중독과 단절, 닫혀버린 꿈의 사다리 앞에 흐느껴우는 우리시대의 인간을 그립니다. 몰락한 귀족으로 누이의 집에 기거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벚꽃동산>의 기예프와도 닮아있죠. 또한 게이란 점에서 이 작품을 쓴 듀랑과도 닮아있습니다.
듀랑은 특히 아동학대, 로마 가톨릭의 도그마와 종교 문화, 동성애와 같은 주제들을 비판적으로 접근해 작품으로 써온 작가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전의 패러디와 많은 사회적 제도에 대한 냉소적 비판을 함께 시도해왔지요.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냐의 동생으로 나오는 소냐는 실제 <바냐 아저씨에서 자존감을 철저하게 상실한 소냐와, 현실의 무게와 장애에 번번히 막혀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무기력의 아이콘인 <세자매>의 이리나와 판박이입니다.
15년간 부모를 모시느라, 결혼도 못했고, 어떤 사회생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소냐는 마샤의 생활비에 기대어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체홉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모습이 어디 과거 한 시점의 인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사회적 맥락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의 조건이나 방식이 바뀌었을 뿐, 그다지 다를바가 없지요. 중요한 건 무기력의 근원이 어디있는가? 결국은 좌절이 누적될 때, 무기력은 습관처럼 삶의 희망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냐의 아침(Morning)은 죽음을 위해 입는 상복(Mourning)이라며 말 장난을 하기도 하죠.
그들의 누적된 피로와 좌절, 우울증은 코스튬 파티에 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말 그대로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거고,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가면'을 쓰는 일일 테니까요. 백설공주 의상을 입은 마샤와 오늘 하루만큼은 남자들과 썸을 타고 싶은 소냐의 공주의상은 이렇게 이뤄지죠. 그들은 자신들만의 소망을 이룰수 있을까요? 연극의 막바지에 바냐의 설움이 폭발합니다. 그의 입술을 통해 듣는 현대인의 삶은 곧 우리들의 비루하지만, 깨진 유리조각의 광채처럼 파편화된 텅빈 화려함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향하는 것들에 대해 그는 지적하고 분노합니다.
오랜만에 찰진 대사들을 들었습니다. SNS에 나오면서 우리는 특히 '멀티 태스킹'이란 단어를 참 자주 썼지요. 저는 이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멀티 태스킹이란게 거의 환상에 가깝고, 실제로는 어떤 한 가지의 과제에도 몰입할 수 없는 수준임을 밝혀줬거든요. 이것 저것, 누리고 먹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의 천국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관계의 단절과 중독에 시달립니다. 항우울증 처방을 받아야 하는 비루한 일상의 무늬를 만든 건 결국 우리지요.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대의 쓸쓸함과 대면하고 치유할 수 있을까요? 안톤 체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적합성을 뜻한다고, 결국 믿음은 하나의 재능이며 우리는 그것을 타고 나야 한다'고 말이에요. 씁쓸하지만 곱씹어볼만 합니다. 체홉만큼 희망에 대해 냉철한 눈을 갖고 글을 쓴 작가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하긴 유태인들에겐 '자기성찰'도 다중 지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지요. 성찰능력이 없는 지능 떨어지는 인간이 많은 시대, 내 안의 견고한 믿음이 신이 준 재능처럼 타고난 것이길 그져 바래봅니다.
아내의 태교를 위해 고른 연극입니다. 연극의 입말을 좋아하는 제게, 오랜동안의 울림을 느껴보라고 골라본 작품이었네요. 다가오는 한 해 멋진 예술작품들을 아내와 함께 자주 보러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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