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교회가 말한다-십일조 못내는 성도는 나가라

패션 큐레이터 2013. 8. 12. 16:11

 


헌금과 연보사이, 길을 잃다

 

어린시절 교회에 갈 때, 아버지는 항상 연보돈이란 걸 주셨다. 연보가 오늘날의 헌금이다. 아버지는 항상 돈을 깨끗하게 관리해서 연보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은행에서 새돈으로 바꿔 내도록 하셨다. 연보는 참 멋진 단어다. '연보(捐補)'는 자기의 재물을 덜어 남을 도와준다는 뜻이다. 버릴 연자에 채울 보자를 쓴다. 나의 것을 주고 내려놓음으로써 타인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뜻이다. 

헌금에는 종교적 목적 외에 교회가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채운다는 뜻도 들어있다. 이것은 교회의 3대 목적이다. 말씀 선포, 성도간 교제, 사회구제. 이 목표를 교회는 한없이 잃고 있다. 맨날 말로는 구제한단다. 문제는 성도의 연보로 이뤄진 교회 재정이 소수의 장로와 측근이 관리하는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예장합동의 십일조를 둘러싼 뻘짓


이번 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에서 소득의 10%를 헌금으로 내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에 대해 자격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빈축을 사고 있다. 교인 자격정지란 장로나 권사 등 교회 내 선출되는 직분에 대한 선거권, 피선거권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개정안 제 17조는 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예배에 출석하지 않거나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는 교인은 권리가 자동 중지된다'고 규정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것이다. 장로교의 미덕이 무엇인가? 교회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절차다. 목사의 전횡을 막고 성도간 소통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것을 깨뜨린 것이다. 이런 근본적 구조도 깨뜨리는 이유가 뭘까? 돈이 미쳐서다. 이래놓고서 교인의 권리만 강조할 수 없다고 한다. 교회란 예배공동체의 공동 자산이건만, 어찌 이나라에선 하나같이 교회를 자칭 자기가 개척한 자들이 자기의 개인재산이란 논리가 뻔뻔스레 먹혀드는 것일까. 


한없는 불투명에 가까운, 헌금


도대체 교회가 성도들에게 어떤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교회 성도의 총유재산이라고 교회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목사 이름으로 명의를 잡고, 교회재산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6개월 이상 예배에 출석하지 않으면 교인은 권리가 자동 중지된다고 했으니, 한국의 총 개신교인 숫자를 구할 때, 등록 교인수로 기준을 잡아 교회 규모를 부풀리기에 바빴으니, 이제서야 제대로 된 크리스천 숫자가 나오게 될까? 중복 등록된 교인이 수두룩하지만 애써 눈감으며, 자기 교회 성도숫자를 인위적으로 늘이기에 바쁘지 않았나?


불투명한 재정구조를 만들고, 재정을 담당하는 성도들은 돈의 내역에 대해서 정보를 접하지도 못하게 막는 것, 제도적 배제가 교회가 할 짓인가? 교회는 예배의 공동체가 모이는 곳이지만, 결국 인간이 모이는 곳이고, 인간의 욕망이 함께 활개치는 곳이기에, 인간의 욕망이 교회를 흔들지 못하도록 투명한 절차와 제도, 철저한 감시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 맨날 목회자란 자들이 포럼에 모여서 정작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회개기도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회개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회개할 가능성을 줄이는 구조를 만들어낼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의 성도들이 할 일이고. 


그릇된 행위를 한 목사에 대한 권징과 치리는 일절 없다. 목사의 자격요건에 대한 조항들은 싹싹 빼먹고, 교회재산을 당회의 결정에 의해 팔 수 있도록 하는 야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목사에게 쓴 소리를 하는 집단은 철저하게 배제하고 자신들의 잇권과 목사측에 달라붙는 이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예장합동측 개정안은 한 마디로, 현대의 교회가 맘몬의 노예가 되었다는 점, 물질을 투명하게 운영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다. 연보는 사라지고 교회를 자기의 주머니로 생각하는 목사들을 위한 헌금. 이제 새로운 맘몬을 주로 섬기는 이들에게 할말은 없다. 가증한 것들에게 하나님의 치리가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