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주팬시스 <내 귀의 심장> 캔버스에 아크릴, 캔사스 천번을 끓여야 라면이 된다? 지난 주말, 인터넷은 기내에서 승무원을 폭행한 한 임원 때문에 시끄러웠다. 라면을 끓여오라 6번이나 시켰고 심지어는 폭행까지 한 것.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라면 소믈리에란 별명을 붙여주었고, 천번을 끓여야 라면이 된다, 진상라면 등 별의 별 야유를 퍼부었다. 패러디 작품까지 나돌았다. 회사에선 보직해임을 시켰고 오늘 해당 임원은 사직서를 냈고 바로 수리되었다는 결론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참 마음이 무겁다. 임원은 조직 내의 별이다. 나 또한 기업에 들어가 이 위치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들은 이 자리를 위해 현재도 열심히 노력중이다. 올해 부장발표가 나면서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긴 했다. 떨어진 친구에겐 위로를, 승진한 친구에겐 축하를 보내주었다. 정치가를 비롯, 각종 단체및 기업의 장이 되면 흔히 권력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된다. 문제는 이때 발생한다. 예전엔 그렇지 않던 이들이, 권력을 쥐면 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변하는가? 타인에 대한 공감도가 절대적으로 떨어진다. 내가 듣고자 하는 것만 듣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는 것. 이점에 대해 CBS의 변상욱 대기자님이 쓴 기사를 읽었다. 권력, 인간을 미친개로 만드는 이유 제목이 <권력을 쥐면 진상이 되는 이유>다. 결론은 내 글의 전체적인 방향과 다르지 않다. 권력을 쥐면, 대접만 받으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하위 관계자를 괴롭히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 기사에서 캘리포니아 대학의 대처 캘트너 연구를 예로 든다. "조직 내 보스의 이런 행동은 뇌의 전두엽 중 '안와전두피질 손상환자'와 비슷한 행동'이라고 한다. 또한 권력을 쥐면 테스토스테론과 그 부산물이 증가하는데 이것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의 증상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승무원을 폭행한 임원의 상태는 정신병이란 결과가 나온다. 타인에 대한 배려없는, 독단적 권력지향의 태도를 뇌과학으로 살펴본 내용이 흥미롭다. 오늘 글을 쓴 이유는 이런 태도는 한 개인에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기업조직도 권력에 맛을 들이면 위의 예가 된 임원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것. 오늘날 기업 내 상층부가 입으로는 고객중심을 외치면서 여전히 고객중심사고를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제품 중심 세계에서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이고 기업이 성공할 때 일어나는 현상 때문이다. 초기에 벤처로 돈 벌 때만 해도 기업과 소비자의 정서적 거리는 가까왔다. 이후 성장하면서 점차 소비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되는 것. 성장과정은 곧 시장 내에서의 확고한 지위가 주는 일종의 권력과 같다. 이후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무게 중심이 고객을 떠나 기업 자체로 이동해가면, 그때부터 기업의 내부 예산, 내부 자원에 대한 관심, 내부의 이해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윗선에 아부하고, 조직 정치학이 등장한다. 고객은 이미 뒤로 내쳐진 것이다. 귀에 심장을 달고 타인의 말을 듣자 이후 매출에 빨간불이 켜지고, 갖은 소비자 의사소통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진심이 와닿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게 감각이 굳어가면,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는 행위도 타성에 젖게 되고, 결국 이는 시장성과에 반영되어 고스란히 기업의 손실로 이어진다.">유리 주펜시스란 젊은 화가의 그림을 보고 있다. 제목은 <내 귀의 심장>. 화가는 왜 귓 속에 심장을 그린 것일까? 듣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 내 앞의 대상의 말을 듣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한자로 듣는다는 뜻은 들을 문 聞 자는 세상의 세미한 정보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란 역할로서, 귀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듣는다는 뜻의 또 다른 한자로 들을 청聽자도 있다. 이는 곧을 직(直)과 마음 심(心)이 들어있다. 곧은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내 영혼을 직립시켜 듣는다는 말이다. 화가의 그림이 마음에 와닿았던 이유는, 기업이 소비자를 향해, 혹은 정부가 시민을 향해 뭔가를 들을 때는 귀 속에 자신의 심장을 걸고 들어야 함을 명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특한 마음없이, 타인의 말을 껴안고 마음으로 품는 것이다. 기업에서 임원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 해당 한 사람만의 능력만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조직원들의 목표가 합치되고, 그들의 라포르(Rapport : 정서적 후원)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나는 승무원 폭행사건의 연루된 임원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포스코 내의 이력을 살펴보니, 낙하산도 아니고 오랜동안 포스코와 함께 해온 이다. 그도 처음에는 팀원들을 배려하고, 대소사를 챙기며 서로 교감하는 이었을거다. 하지만 조직 내의 위계가 올라갈 수록, 예전의 정서적 거리에서 멀어져, 홀로 자신만의 탑을 쌓았을 것이다. 오로지 성과만을 강조하는 이 땅의 기업문화, 나아가 한국적 삶의 모순이 그대로 녹아있다. 좋은 기업이 되고 싶다면, 시장에서의 현재 기업이 가진 위상을 잊을 필요가 있다. 그 위상까지 가도록 도와준 것은 소비자이고, 소비자들의 헌신적인 라포르가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 라면을 천번 끓여야 하는 게 아니라, 고객을 천번 만나고, 천번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된다. 그런데 망각하는 기업들이 꽤 많다. 그만큼 우리가 위기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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