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엔젤스 셰어, 천사들을 위해 남겨야 할 위스키의 몫

패션 큐레이터 2013. 6. 30. 00:30


성곡미술관에 종종 간다. 정원이 참 예쁜 곳이다. 

봄에는 벚꽃을, 여름에는 신록이 우거진 정원 내 카페에서 

풍경이 바람에 스치며 내는 댕그런 소리가 좋아서 그렇게 자주 간다.

현대미술전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이다. 되집어보면 그만큼 정신적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곳이란 뜻이다. 설치작품이며, 그림이며 쉬운게 별로 없었다. 만드는 이도 힘

들겠지만 그것을 읽고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이도 여전히 힘들다. 현대미술을 수용

미학의 장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이리라. 힘든 걸 보기 전엔 

항상 뱃속이 그래도 차있는게 좋았다. 허기지면 마음까지 힘들다. 



성곡에 갈때마다 자주 식사하게 되는 곳에 기자분과 함께 갔다. 

브런치 세트를 내면 간단하게 나온다. 빵과 감자를 갈아 만든 스프레드

여기에 그날의 샐러드와 파스타, 그리고 디저트와 차가 나온다. 이곳을 자주 가게

된 것은 좋아하는 화가와 책을 출간한 후 만나 식사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작은 이유였다. 

바늘과 실을 좋아하는 내게, 실내 인테리어에 실패에 실을 묶어서 삼단으로 장식해놓은 것이 약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테리어는 나도 한번 따라해봐야지 했던 곳이어서였다. 



켄로치의 영화 <엔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봤다. 나는 

개인적으로 켄 로치를 좋아한다. 대학시절부터 그의 초기영화를 즐겨봤다. 

사회에 나와서도 그의 모든 필모그라피에 담긴 작품들을 힘겹게 구해 읽어보는 것이

작은 낙이었다. 스페인 내란에 대한 좌파적 시각이 돋보인 <랜드 앤 프리덤> 중년의 실직가장

을 둘러싼 좌충우돌 부채 변제기 <레이닝 스톤> 니카라과 혁명 속 인간의 실존적인 삶을 아련하게 다룬

<칼라송> 멕시코에서 기회의 땅 미국으로 밀입국한 여인의 이야기, 특히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의 문제를 유쾌

하지만 정교한 시선으로 보았던 <빵과 장미> 이후 2006년 칸 영화제가 선택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에 이르기까지, 난 그의 모든 영화적 연대기를 함께 해왔다고 자부한다. 함께 간 기자님도 그랬고.



해물파스타가 입에 딱 맞았다. 음식을 먹다보면, 영화 속 특정 장면이 

오버랩되거나 떠오를때가 있다. 이번 <엔젤스 셰어>는 위스키를 만들어 오크통

에 저장할 때 자연스레 증류되어 없어지는 몫을 뜻한단다. 말 그대로 하늘의 천사들을 위한

몫일 것이다. 영어 표현중엔 Lion's Share란 표현도 있다. 사냥후 숫 사자가 먹는 부위, 가장 좋은 

부위란 뜻이고, 사회적으론 황금노른자같은 지위나 영역, 혹은 얻게 되는 급부를 뜻한다. 

유독 제목이 눈에 들어왔던건, 영화 속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영국 사회에서 루저

에 가까운 이들이고, 이들은 사회가 소수에게 제공하는 라이온스 셰어에서

어차피 멀어진 이들이다. 이들의 인생역전기를 다룬 영화다. 


백수로 뜨내기 인생을 살아가는 폭력전과의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고 아빠가 되면서, 멋진 아빠가 되기 위해 환골탈퇴하는 과정이 

아주 유쾌하다.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씩의 달란트는 있는 법, 주인공 남자를

위해 하늘이 예비한 것은 바로 정교한 혀다. 혀로 맛추는 위스키. 요즘 표현대로 하면

위스키 소믈리에 정도 되겠다. 자신을 감찰하는 어른으로 부터 위스키에 대해 배우고 그 역사와

향과 미학을 배우면서 그는 어느새, 위스키 전문가가 되어간다. 물론 삶은 여전히 버겁고 

비루하다. 폭력의 끈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의지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주변이 그를 향해 여전히 적대적이고, 강한 칼날을 가는 한, 너무나 

힘들다. 이때 그를 지켜주는 건 역시, 위스키에 대한 새로운 사랑. 



뭐 영화 이야기를 주절거리지 않아도 이 영화가 인생 역전에 성공하는

루저들의 이야기임은 당연할터. 그래도 좋은 건, 켄 로치의 시각이 점차 따듯하게

세상을 향해 조금씩 촉수를 펼쳐가는 게 느껴져 좋다. 우리는 흔히 차가운 말을 하는 이들을

가리켜 '긍정적이지 못하다'란 말로 함부로 평가한다. 그러나 긍정이란 부정의 감정과 

대칭을 이루고 그것이 균형을 잡을 때, 개념에 대한 명쾌한 뜻을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긍정적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한 것들을 짚어내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속에서 대안을 찾아야 그게 긍정이다.

맨날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떠드는 건, 일종의 위약이고. 



우리 모두 사회 속에서 타자들과 실 당기기 놀이를 한다. 

한쪽은 당기고 끌려가기도 하고 다시 밀어내기도 한다. 실패는 그 

위로 감겨진 실의 방향에 따라, 앞으로 혹은 뒤로 간다. 그래서 어떤 구조를 

만드는 일은 이렇게 중요하다. 한 사회에서 적절한 셰어, 몫이 타자들에게 전달되기 

어려운 구조라면, 반드시 성찰하고 다시 볼 일이며, 그런 사회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 빠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실패 위에 감긴 실이 되기를 포기하게 된다. 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서로에게, 타자에게 천사의 몫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힘든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이미 이전투구로 점철된, 인간의 몫을 상실한 사회이리라. 



영화 속 OST 가사를 생각해보면, 점점 아빠로 살아가는 게 힘들지

생각도 해보고, 참 남자로 살아가는 게 진짜 힘들구나 라고 푸념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속내도 자세히보면 힘들지 않은 이가 없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함께 연대하고 

또 새로운 인생의 역전기를 꿈꾸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켄 로치의 

영화는 우리 모두를 위한 알딸딸한 천사의 위로, 그 몫을 제대로 보여준다. 

60년대 영국의 프리 시네마는 사회에 대한 올곧은 돌직구를 던지는 

다큐멘터리의 정신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세월을 통해 

따스한 스웨터를 입은 그의 영화가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