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멘토는 없다, 언제나 당신이 답이다-영화 <마스터>

패션 큐레이터 2013. 8. 2. 01:07




영화 마스터, 멘토 중독사회의 자화상


주말이면 광화문 시네큐브에 갑니다. 책 쓰느라 보지 못한 영화들을 담기 위해서죠. 동선은 단순합니다. 서점에서 책 읽다가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청계천을 따라 걷다 밥을 먹는 것. 일관성있게 시간과 동선을 조직하는 것도 재밌긴 합니다. 일관성, 한결같음 만큼 우리의 삶을 안정시키는 건 없지요. 일관성은 잦은 변화가 주는 피로감에 대항해 우리의 존엄을 지키려는 삶의 미덕입니다. 물론 에디슨은 한결같음이 상상력이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씹어대긴 했지만요. 종교도 한결같음의 힘으로 우리의 내면을 지키는 삶의 메커니즘입니다. 


영화를 본 후 맥주에 치킨, 덮밥, 샐러드, 홍합 넣은 수제비까지 꾸역꾸역 먹습니다. 뭔가 마음 속에 아린 것이 있을 때, 이런 행동이 나오더라구요. 오늘 본 영화 <마스터>가 그렇습니다. 영화는 종교적 영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우화라고 할까요.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끓었습니다. 내 안의 어떤 열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했죠. 그래서 폭식을 했던 건 아닐까 싶네요.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는가? 란 태그라인이 걸리더군요. 요즘 가나안 성도들이 늘고 있다지요. 가나안 성도란 크리스천이지만 실제로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를 뜻한답니다.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툭하면 헌금이나 강요하는 현대 교회에 실망한 성도들이랍니다.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라면 이 문제에 대해 사회적인 반성을 해야 할텐데, 최근 예장통합에선 성도를 헌금액수와 횟수로 나누어 성도의 자격을 나누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것이죠. 인간이 종교를 의지하는게 아니라, 종교체계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요즘입니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사회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각자 목표를 세우고 세상으로 돌아가라지만, 전장터의 참사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죠. 특히 전쟁터에서 살육의 현실을 눈으로 봐야했던 이들이니 상처는 더 클 것입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프레디 퀠은 바로 이런 군인 중 한명이죠. 그는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살다가 술에 취해 쫒겨나고 한 유람선의 파티장에서 난동을 부리다 랭케스터란 이를 만나게 됩니다. 



믿지 못할 세상, 나를 구원할 마스터는 어디에 있는가


랭케스터는 인간심리를 연구하는 코즈 연합회를 이끄는 일종의 마스터였습니다. 감독노트를 보니 랭케스터는 오늘날 사이언톨로지의 교주, 론 허버드를 모델로 만든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만나 친구가 됩니다. 랭케스터는 프레디의 마음 속 깊은 상처의 응어리를 건들고, 그에게 자신의 심리치유가 목적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을 불어넣습니다. 그렇게 프레디는 그의 열혈 충복 겸 연구대상이 됩니다. 랭캐스터는 프레디의 멘토가 된 것이죠. 프레디는 렝케스터의 입장에 의심을 표명하는 신도들을 구타하기도 하고 매 세션을 지키는 파수병 역할을 하죠. 말 그래도 복음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프레디의 마음은 치유되지 못하고 둘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기죠. 왜 멘토와 멘티 사이엔 균열이 생긴 걸까요. 



코즈 연합회란 곳은 심리치료를 빙자, 전생을 치료하면 현재의 병도 낫는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논리적 실증을 요구하는 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프레디에 대한 믿음을 버리진 않죠. 하지만 결국 그는 떠나고 맙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 속의 마스터를 찾습니다. 마스터란 단어는 최근에 열풍처럼 한국사회를 달군 멘토란 단어와 환치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선과 명상, 각종 힐링을 빙자한 치유책까지. 


힐링을 테마로 하는 얼마나 많은 책들이 출판되던가요. 유행처럼 우리의 삶을 잠식합니다. 개나 소나 멘토라고 떠들고 있고, 우리들은 그들에게 흥분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채워줄 마스터란 세상에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마스터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할까? 라는 답을 미리 내려놓은채요. 쉽지 않은 질문이죠.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책들은 나에게 모든 자유란 잠정적인 것이다. 자유는 자기의 노예 상태, 아니면 적어도 자기 헌신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라고 말합니다. 잘 살기 위해선, 진정한 자유를 위해선 책 속의 가르침을 빨리 잊고 생살로 나를 둘러싼 삶의 환희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체계도 결국은 풍화된 뼈로 남은 말씀의 힘을 믿고 나가는 것. 그 뼈에 내 개인의 욕심이 낳는 살을 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육화된 형식으로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중세 고딕 성당이 그 예이죠. 높은 첨탑으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교회는, 절대자를 향한 자신의 종교적 열망을 겉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열망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에 심어야 할 것 보다 가치있게 삼았다는 점이죠. 우리는 그렇게 멘토를 찾았습니다. 성공모델로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성취한 이들, 혹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포섭의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너무 쉽게 던져버렸습니다. 



영화 끝에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말하죠. '세상 어느 마스터에게도 속하지 말고 너 자신이 마스터가 되라'고요. 이것은 단순하게 한 개인을 신의 영역으로 발전시켜라는 메시지가 아닐 것입니다. 종교조차도 마스터의 역할을 저버린 세상,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으니, 적어도 살아야 한다는 견고한 믿음 하나 만큼은 버리지 말라는 말로 들렸거든요. 여러분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