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마지막 4중주-인생이란 악보를 연주하는 법

패션 큐레이터 2013. 8. 3. 05:08

 


T.S 엘리어트의 사중주를 읽는 시간


"현재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둘 다 아마도 미래 시간에 현존하고, 미래 시간은 과거 시간에 담겨 있으리라.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모든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은 하나의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하나의 추상이다. 있을 수도 있었던 것과 있었던 것은 언제나 현존하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모든 것은 영원한 현재이다"


글을 쓰는 지금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의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 1악장을 들으며 시인 T.S 엘리어트의 <사중주 Four Quartet>를 읽는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 Late Quartet> 엘리어트의 사중주에서 한 구절을 빌려옴으로써 시작을 알린다. 엘리어트는 시의 첫 장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글을 사유하면서 시작한다. "세계를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지혜를 갖고 살 뿐, 뜨고 지는 운동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소크라테스 이전, 그는 인간의 존재와 양상을 고민한 철학자다. 존재와 항상성, 변화의 문제, 즉 삶의 과정을 고민했다. 6년 여에 걸쳐 쓴 4개의 시를 모아 편집한 것이<사중주>다. 인간과 시간의 관계 맺기. 시간 속에서 변화의 양상과 맞닥드리는 인간에 대해 썼다. 

 


인간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닮는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25년간 호흡을 맞춰온 푸가 현악 사중주단의 이야기다. 연주자 4명의 성격과 각 인물의 역사는 자신이 다뤄온 악기의 속성을 닮았다. 퍼스트 바이올린과 세컨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 각자 현의 울림으로 공간 속에 선율을 만들지만 소리의 속성과 곡을 둘러싼 역할 문제로 인해, 소리를 다루는 이들의 성향도 영향을 받는다. 사중주는 각각의 악기가 직물처럼 교직되며 음을 만든다. 앞으로 치고 나가는 퍼스트 바이올린은 4중주의 얼굴이다. 화려한 기교로 멜로디를 맡는다. 퍼스트와 비올라를 위해 멜로디를 보조하는 세컨 바이올린, 저음을 책임지는 첼로는 퍼스트 바이올린과 함께 밖으로 드러나는 음을 책임진다. 


세컨 바이올린과 함께 내적인 음을 맡는 비올라가 있다. 현악 사중주의 네 악기에 대해,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퍼스트 바이올린은 언제나 화제를 제공하며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치있는 중년, 세컨 바이올린은 소극적이고 양보하는 친구, 비올라는 대화에 꽃을 피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는 여성, 그리고 첼로는 학식이 많고 대화를 조정하는 중후한 신사" 라고. 그러고보니 영화 속 악기주자들은 스탕달이 지적한 나이대의 인물들이다. 이 영화는 각 4명의 과거 속 시간과 현재의 영향, 앞으로 흘러가게 될 양상을 음악연주라는 퍼포먼스를 통해 어떻게 전개될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삶의 양상은 영화관객의 삶을 투영한다.



영화의 갈등은 사중주단의 멘토이자 스승인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씨 병 초기 진단을 받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25년간 너무나 평온하게 자신의 음을 지켜온 듯한 이들. 그러나 악기주자인 네명의 관계를 보면 결코 소소하지 않다. 영화는 여기에서 클래식을 주제로 한 영화지만 '막장 드라마'급으로 전환될 요소들을 조금씩 보여준다. 알고보면 비올라 주자인 줄리엣은 세컨 바이올린을 맡은 로버트의 아내지만, 과거 퍼스트 바이올린인 대니얼의 연인이었고, 피터에겐 딸과 다름없는 존재다. 


로버트는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사랑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연주자가 되었고, 바이올린에 온통 감정을 다 쏟아낸 터라, 냉철하고 재미없는 대니얼은 우연한 기회에 로버트와 줄리엣의 딸인 알렉산드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 정도면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그런데 왜 이 영화는 내용은 막장인데 끝판에 내게서 한웅큼의 눈물을 훔쳐간 걸까? 위기에 처한 4중주단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곡에 도전한다. 피터의 고별무대를 위해서다. 힘겨운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지금껏 웅크려있던 해묵은 감정들이 표면에 드러나는 건 당연한 이치일터. 



내가 이 영화를 적어도 올해 상반기 최고의 영화라고 꼽고 싶은 이유는 악기를 은유로 인간의 유형을 설명해내는 탁월한 힘 때문이다. 인생에서 우리는 각자 역할을 맡는다. 그 역할이 오랜동안 지속되다보면 우리의 몸 속엔 역할이 만들어내는 성격이 형성된다. 잘 나가는 인간, 맨날 잘 나가는 인간을 받쳐주기만 하는 인간, 그저 묵직하게 뒤를 봐주기만 하는 사람, 세상사에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있던가. 현악 사중주단도 별 다를바 없다. 


세컨 바이올린은 퍼스트에 대해 '우리의 관계는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역할에 따른 것"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은 항상 주목받는 퍼스트 바이올린에게만 박수를 보낸다. 영어에서 Playing the Second Fiddle(세컨 바이올린을 맡다)란 표현이 왜 남의 뒷처리나 하고 부차적인 일을 하다란 뜻이 생겼을까. 영화 속에서 로버트는 그게 싫어서 자기가 퍼스트를 맡겠다고 주장하며 대립하지만, 결국 하지 못한다. 퍼스트를 맡을 재능이나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세컨드를 맡아줄 때 4중주단이 가장 돋보이기 때문이다. 



뭐 퍼스트 바이올린이라고 사정이 없겠는가? 로버트의 딸인 알렉산드라의 사사를 맡으면서 퍼스트 바이올린으로 살아오며 형성된 자아가 그대로 투영된다. 이런 사람 속된 말로 재수없다. 완벽주의자고, 자기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연주에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낸터라, 다른 인간, 다른 사물과 나눌, 혹은 선사할 자신의 감정이 없는 존재. 연주는 일관성을 갖고 풍성해질지 모르지만 어느새 고인물이 되기 쉽다. 열정이란 얼굴이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올 여유가 없어서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줄리엣에 대한 회환도 있을거고 그래서인지 혼자산다. 



음악이 지속되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


비올라를 맡은 줄리엣도 마찬가지, 로버트와 연애하다 갑자기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대니얼과의 관계는 정리하고 결혼한다. 연주를 위해 해외를 다니느라 딸을 돌보지 못했다. 은연중에 남편을 깔보고 무시했을 것이다. 그녀의 딸이 '아버지를 신발 깔개 정도로 안다'는 대사가 나오는 걸 보면 빤하지 싶다. 그렇다고 과거를 되돌릴수도 없는 법, 현재의 시간에서 그들은 최고의 연주를 위해 다시 한번 모인다. 물론 내생적인 한계가 있다. 저음을 맡은, 어찌보면 인생의 뼈대와 구조가 된 피터의 병환 때문이다. 새로운 첼로주자를 영입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경우, 지금껏 해왔던 역할의 변화와 소리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연주한다. 마지막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곡을. 쉼없이 달려야 하기에 그 과정에서 음들이 뒤틀이고 선율은 열차의 선로 위에서 무게를 잃고 탈선하기도 쉽지만, 그들은 그냥 간다. 그 과정에서 희망을 잃을수도 있지만 결국 희망이란 것도 엘리어트의 표현처럼 그릇된 것들에 대한 희망일 수 있으니. 연주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은 연주를 통해 자기의 존재증명을 한다. 과거와 미래를 엮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엘리어트는 썼다. "음악이 지속되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라고. 우리의 삶이 버거운 현재 속에 속박되어 있지만, 시간을 통해서만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내게 말해 주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오랜 사회생활에서 나는 삶의 4중주를 함께 해갈 친구들이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자문에 대한 대답이 만만치 않다. 찾아보리라. 가까운데서 누군가는 나를 위해 세컨드 바이올린을 연주해준 이가 있을 것이고, 첼로가, 비올라가 되어준 이가 있었다. 되짚어보니 보인다. 이 영화를 통해 음악이 왜 시간예술인지를 이제서야 알거 같다. 머리가 나빠 이제서야 조금 보인다. 고요한 침묵의 지점에 서서, 베토벤을 들어야겠다. 나를 둘러싼 이들에게 외경심을 갖게 되는 새벽이다. 고맙다 인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