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사랑의 담론은 여전히 어렵다

패션 큐레이터 2013. 3. 19. 06:00

 

 

 

영화의 상수(Constant)가 되고 싶은 그에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봤다. 작가주의란 구태스런 단어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 특유의 목소리와 시선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특유의 관점은 진부할 정도로 반복되고, 영화제 수상을 위한 욕망이 지속적으로 작품 속에 투영된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주인공인 대학생 해원은 연영과 교수인 성준과 비밀스런 관계다. 이러던 차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엄마와 만나 서촌을 거닐고, 작별을 위한 마지막 차 한잔의 시간, 우연히 스치고간 두 남자의 여운을 마음에 담는다. 세계적인 가수 제인 버킨이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긴 했다. 하긴 여인들의 잇백이라 불리는 버킨 백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이후 성준을 만나 우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지만 당췌 현실의 비루함은 강력하기만 하다. 그녀의 주변 상황은 끊임없이 서촌에서 남한산성으로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동선의 틀 속에 갖혀있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길의 이미지, 그 속에서 작은 정경들은 마치 미로처럼, 젊은 날의 해원을 구속하는 요소가 된다. 그녀가 현실을 버티는 것은 오로지 꿈 속으로의 탈피다. 그녀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잠이 든다. 사회학자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란 책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내가 엘리아스를 알게 된 건, 복식사를 공부하면서다. 그가 쓴 <문명화 과정><궁정사회>는 내가 지금껏 옆에 두고 지속적으로 읽는 책이다. 인간의 문명이 진화하는 과정, 그 중에서도 예법과 패션, 궁정에서의 세련된 매너의 발전에 대해 아주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그렇게 왕성하게 학문의 영역을 소요유 하던 엘리아스가 인생의 말년에 썼던 책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고독한 죽음을 사회학적 문제로 규정하고 이의 원인들을 성찰한 내용들을 담는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라는 표피적인 세계의 배후, 혹은 그 내부에는 철저하게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의 증가라는 문제가 자리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이 책의 겉표지가 등장하는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꿈을 꾼다는 미명하에, 이미 현실에서 죽은 자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열정의 또 다른 표출방식이라면, 이것을 쉽게 식히는 것 보다 더욱 건강하게 풀어가려면 열정을 장기간에 걸쳐 배분할 수 있는 친밀감의 전략을 짜야 한다고 사랑의 전문가들은 말한다. 말은 쉽다.

 

사랑이란게 좌표가 명확한 것도 아니고, 타인의 족적을 따라 내 자신의 발자국을 남길 수도 없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저기에 사랑이 있다'라고 말할 뿐,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 항상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사랑에 대해, 진리가 상존한다고 질리게 강조하는 세상에서, 모호성은 홍상수식 영화의 불도장이 되었던게 사실이다. 그 어느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이를 위해 선택하는 이야기 상의 주인공의 프로필이 매번 엇비슷하다는 것. 애매모호함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부류의 산물처럼 보이는 것도 한편으론 단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의 영화 속에서 느껴온 심성들은 이렇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이 삶의 상수가 아닌 주변부의 변수로 머문다는 것.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 사랑 앞에서 아프다. 사랑은 현실과 꿈의 이원적인 힘 앞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패배한 자의 영혼 속으로 물매를 지속한다. 떠나보내야 할 사랑을 애도하지 못한 채, 현실의 껍질 위에서, 언제든 금이 가기 쉬운 표면을 위험천만하게 걷기만 한다. 그렇게 동네를 걷고 남한산성을 걷는다. 


내가 보기엔 홍상수 감독은 사랑에 대한 총체적인 믿음을 버리거나 혹은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분명 사랑의 속성에 대해 영화적으로 풀어가는 문제를 여전히 진지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꿈이 영화 속에서 재차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질끈감아버리고 싶은 생의 무거움을, 마음 깊숙한 곳의 욕망이 은밀하게 터져나오는 꿈이란 코드로 치환해버린 것 말이다. 해원이 누구의 딸도 아닌 것은, 지금 그녀가 이 생에서 살아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뜻 같기도 했다. 적어도 내겐. 

 


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는 딱 한 가지다. '깃발이 얼마나 멋진 발명품이야, 이게 있으니 바람이 있다는 걸 알수 있잖아' 라고. 비가시적인 힘, 사랑의 폭력 앞에 대책 없이 지리멸렬하게 변해가는 인간의 찌찔함을, 답답합을, 나름대로 포착하려고 감독은 꽤나 고생한다. 문제는 이런 식의 문제해결 방식이 이미 영화제에서 '쬐끔 있어 보이려는방식' 이나 '작가인 척' 해보려는 감독의 의도임을 간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홍상수 감독은 언제쯤 영화제에 대한 그의 욕망을 접을 수 있을까? 쪼금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