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가족은 찌질할 수 밖에 없다

패션 큐레이터 2013. 3. 24. 14:55


봄볕이 따뜻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가 대기 속에 숭숭 박혀 있더니

이제 사라진 건지. 예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동네 하천길을 산책할 때면, 봄이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속살을 터뜨리는 목련과 개나리가 길가에 피어서 좋았다. 지금 살고 있는 워커힐을

물론 조금만 있으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지만, 노란색 기운을 발현하는 개나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상하게 노랑색을 좋아하는 나는, 올 봄 튈듯한 노랑색 바지를 샀다. 성글게 짠 베이지색 편물과 나바호 

인디언들의 무늬를 녹인 신발과 함께 입을 것이다. 명멸하는 봄이라서 더욱, 짧은 봄 맞이와 

앓이를 하지 싶다. 그렇게 바람이 불고 봄은 우리 안에 와있다. 이제서야 인지한거다.



주말을 틈타 한 편의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10번은 족히 본

작품이다. 조너선 데이튼 감독의 <미스 리틀 선샤인>.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가 

추천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를 만난 계기는 뉴욕 출장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기내다

 처음에 뭐지 하고 봤던 영화는 2번을 연거푸 보고, 집에 와선 DVD를 구해 다시 큰 화면으로 봤다.

이 영화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가족은 그저 동양과 서양을 통털어, 각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집단이다. 속정과 따스함, 가족의 연대가 있는 반면, 지나친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힘겹기도 하고, 그래서 더더욱 말못하고 힘겹기도 한 이중의 

얼굴을 가진 존재. 그래서 가족은 소중하면서도 애증의 관계로 뭉쳐있다.



영화 속 가족의 구성원들은 뭐 그닥 새로울 건 없다. 오히려 비루하고 찌질

하달까. 아빠이자 가장인 리차드는 요즘 한국사회를 달구고 있는 자기계발 강사다

자칭 절대무패 9단계 이론을 책으로 내 떠보려고 노력 중인데, 어찌 썩 잘풀리는 것 같지않다. 

남편에게 항상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엄마 쉐릴은, 매번 식탁에 닭튀김만 내놓아서 할아버지와 냉전 중

여기에 할아버지는 최근 양로원에서 헤로인 복용으로 쫒겨나 아들 집에 몸을 맡긴 상태. 그런데 

할아버지, 어찌 우리의 상상 속 느긋한 할아버지의 미덕은 온데 간데 없고 15살 손자에게

에로티시즘(?)을 가르치다 못해 강요한다. 섹스가 중요하다고 온통 도배질이다. 



여기에 게이인 외삼촌은 최근 애인에게 차여 상실감에 쩔어 있고, 그나마 그가

말을 거는 조카 드웨인은 실어증인지, 아님 말을 하기 싫은 것인지 쪽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할 뿐이다. 여기에 막내딸 7살짜리 올리브는 뚱뚱한 매력을 무기로 삼아, 미스 패전트, 미인대회

에 나가겠다고 난리다. 한 마디로 찌질함과 콩가루, 막장을 버무려 놓은 비루함의 결정체 같은 가족들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가 열리는 서부 캘리포니아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 

딸의 기를 죽이기 않겠다는 부모의 멋진 의사결정은 고물차를 사서 이틀을 꼬박 운전해

경연장으로 가기로 한다. 좁아터진 고물 버스에서 후버내 가족은 쌓였던 갈등이 

터지고, 싸우고, 삐지고, 되받아치고, 고성이 오가는 여행을 하고 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차까지 고장이 나고, 별별 고생끝에 경연장에 도착.

뭐 사실 이런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구조가 통일되어 있다. 내적으로 숨겨진 

갈등의 무늬가 여행이라는 과정에 녹아서, 그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발효가 되는 것이다. 

성장과 자기계발의 수사학 중엔 유독 '당신의 길을 가라' 라는 식의 메시지가 많은 건 당연하지 싶다. 

영화장르에 로드 무비가 있는 건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여행은 하나의 은유일 뿐, 그 과정

에서 우리 내 삶의 진풍경이 드러나는 촉매제일 뿐이리라. 가족의 갈등도 길 위에서 

다 흩뿌려지고 나면, 그렇게 앙금의 입자들이 사라질 때, 새롭게 상처를 감싸는

감정의 아교를 사용한다. 가족의 연대, 그 가능성과 희망을 모색한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이다란 식의 진부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화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되는 요소가 가족이란 단어에 숨어

있는 것일거다. 가족은 자연스레 태어나지 않는다. 두 개의 판이한 삶의 이야기를 가진 여자와

남자가 만나 일차적으로 연금술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문화적 유전자를 계승한 이들과의 다른

조우를 통해 형성되고 외부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가족의 치부는 곧 개별 구성원의 치부가 되기에

감추고 은폐하고 서로에게 창피를 주고 상처를 준다. 돈 못버는 가장이 모난 언어의 돌을 

맞아야 할 이유도 없으며, 직장을 다니는 며느리에 비해, 가사만 하느라 경제력 


딸리는 며느리가 밉게 보여도 안된다. 그들이 선택한 삶이고, 그 과정의

어느 한 순간이 잠시 흔들리고 둔턱에 걸렸을 뿐이라고 믿는다. 이 영화는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행복한 가족은 그 내면을 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질의 현무암 같지만, 그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가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매달리고 의지하며

채워낸 삶의 연수들일 것이다. 연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버텼다는 것 

만으로도 그에게는 개별인간으로 살아올 때와 다른 '식별부호'가 생긴 셈이된다. 



이 영화의 가족 구성원들을 보면, 이 땅에 창궐하는 신자유주의의 경쟁

속에서 실패한 인간들의 전형들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엄격한 학문의 세계

에도 성적 차별과 성적 지향성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배제가 있으며, 성공과 물신주의에 젖어 

나름의 방법론을 찾아보지만, 결코 보편화하기엔 어려운 우리들만의 사연이다. 그렇게 환원되고 

축소되어 버린 삶이다. 미스 리틀 선샤인, 우리식의 이쁜 어린이 선발대회에 나온 아이들의 말씨며, 태도, 

사진포즈는 하나같이 어른들이 동일 나이, 동일 세대를 평가할 때 쓰는 기준들이다. 연령만 낮을 뿐

아이들의 다음 삶이 그닥 밝아보이지 않는 건, 이런 쓰잘데기 없는 기준에 우리들이 너무나

스스로를 맞추고 살아야지 하는 내면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성형빨 인형들이여!



가족 영화와 로드 무비의 결합, 가족의 삶은 실타래처럼 길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틔운다. 당연한 결과이고 수순일터. 그러나 한 가지

가족 단위가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순수하게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가족 이벤트

이런거 하나는 좀 챙기며 살아야 하지 않나 싶다. 가족여행이든 영화 처럼 경연대회를 나가든

삶의 한 순간들에 가족을 초대하는 일,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해보자.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 되집어보면 나도 가족 이외의 타자들에게유난히 

친절했다. 정작 가족은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반성한다. 뼈저리게. 

가족만큼 유의미한 타자는 없을 것이다. 잘 쫌 해야지 한다.


자기계발의 광풍이 부는 사회, 그저 믿을 것이라곤 성공학 강사의 

이야기와 자칭 만담꾼 같은 자기계발 강사들의 입담에서 힐링을 찾아야 하는

사회는 분명 건강하지 않다. 그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힐링을 도처에서 외치면서

강구할 수단과 찾을 수 있는 방식이 그것 밖에 없다면, 그만큼 사회의 탈출구가 좁다는 뜻

아니겠는가? 스스로 자기계발의 늪에 빠지고, 그들의 언어에서 위로를 찾으며 사는

삶은 사실은 '관성으로 가득한 삶'일 것이다. 진정한 자기계발은 무엇일까? 

그걸 알면 강사라도 할텐데 말이다. 입담이 좋지 못해 포기할란다.

다만 하늘 빛이 곱다고 엄마에게 전화 거는 센스는 챙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