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달팽이 식당-미각과 힐링은 함께 걷는다

패션 큐레이터 2013. 2. 20. 06:30

 


영화 속 음식, 견고한 모든 것은 요리 속에 용해된다


나는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좋아한다. 나만의 영화 목록을 뽑다 보면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이안의 <음식남녀>. 자질구레한 가족들의 반목은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씩 용해된다. 애미에이션인 <라따뚜이>를 빼놓으면 서러울 뻔 했다. 박찬일 쉐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란 책 제목이 떠오르는 영화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미각, 가장 달콤하고 행복한 맛의 기억은 결국 추억이 빚어내는 것임을 알려준 영화다. 아오이 유우가 나왔던 <양과자점 코안도르>도 기억난다. 이 영화를 본 후 제자들과 함께 다양한 케이크를 먹으러 제과점에 찾아갔다.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음식을 먹으며 노변정담을 나누는 것은 내겐 일종의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 중 하나다. <남극의 쉐프> 같은 이국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요리 이야기도 있다. 에도시대에서 현대로 타임슬립을 한 사무라이가 요리를 배우는 모습, 요리를 통해 멋진 삼촌이 되어가는 영화 <촌마게 푸딩>도 빠질 수는 없다. 요리하면 떠오르는 <카모메 식당>도 필모그라피에 넣어야 한다. 북유럽의 느긋한 감성과 맞아떨어지는 주먹밥을 잊을 수 없잖은가?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요리란 소재를 영화가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당신과 나의 혀, 그 끝에 서있는 세계


요리는 기본적으로 만드는 주체가, 요리를 통해 베풀고 싶은 세계의 타자들을 향해 여는 잔치다. 요리는 그 과정에서 감정이 응축된 새로운 인간의 소우주를 이룬다. 카모메 식당에서의 오니기리나, 촌마게 푸딩의 우유푸딩도 이런 감정의 산물이다. 감싸주고 싶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는 것이다. 요리 영화는 진부할 수도 있지만, 질리지 않는 백미밥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오늘 소개할 영화 <달팽이 식당>도 이런 느낌의 연장선이다. 일본의 소설가 오가와 이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했다. 주인공 린코는 어린시절 술집을 운영하는 엄마가 자신을 불륜을 통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동네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어지는 가출과 친할머니와의 만남, 요리의 달인이었던 할머니에게 다양한 요리를 배웠고, 스스로 요리집을 낼 생각에 인도 출신의 애인과 힘든 나날의 삶도 행복하게 버텨낸다. 그러나 애인은 돈과 가재도구 일체를 들고 튀었고. 그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다. 


할수 없이 엄마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에르메스란 돼지를 키우며 사는 엄마는 딸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10년 만에 찾아온 딸이건만 돼지를 돌봐주는 조건으로 집에 기거하는 걸 허락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로 천불나게 하는 것도 다반사. 그런 엄마에 대한 추억이 그녀를 달팽이처럼 웅크리게 만든다. 이웃에 사는 다리가 불편한 쿠마 아저씨와 동업을 통해 집에 붙어있던 헛간을 치우고 이곳에 그녀의 달팽이 식당을 차린다. 이 식당의 운영원칙은 딱 한 가지. 하루에 한 번만 예약을 받는 것. 생각만 해도 멋지다. 서울에도 이와 비슷한 곳이 있다. 내가 다녔던 교회 옆에는 하루에 한 가족만을 받아 요리를 해준다. 엄마가 요리를 하는 동안, 아빠는 치유상담을 하고, 딸은 첼로를 연주하는 멋진 곳이었다. 요리가 누군가의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행위라면, 그런 전제하에서 이런 사업 모델은 최고의 유토피아다. 문제는 현실에서 운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겠지만. 



내 영혼의 주템므 수프


린코의 식당은 의외의 변수로 인기를 얻는다. 함께 동업을 한 쿠마 아저씨에게 만들어준 카레가, 그를 떠난 아내와 딸에게서 전화가 오게끔 만든 것.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후 짝사랑에 빠진 여고생과 남자친구를 위해 만들어준 쥬 템므 수프가 힘을 발휘한 것. 이후 그녀의 레스토랑은 소원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이 예약전쟁을 치룬다. 소원을 이룬 이들 중에는 학생들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시작, 빅토리아 시대 풍의 검정색 상복과 베일을 한 할머니가 나온다. 남편을 잃고 그를 그리워하며 평생 상복만을 고집하던 그녀를 초대해 요리해 준 것. 지금껏 인도카레와 무화과를 잘라 치즈 위에 얹은 샌드위치와 같은 단품을 넘어, 이제 코스 요리로 넘어간다. 


얇게 저민 사과와 요거트, 이어지는 대합조갯살 회와 삼계탕, 버터로 볶은 밥 위에 송어난자절임을 올린 카리스미란 이름의 리조또 요리가 나오고, 이어 새끼양고기를 마늘과 함께 단 시간에 튀겨낸 소테(Saute) 요리는 정점을 찍는다. 이후 달콤한 커피와 케익까지 완전한 코스요리를 완성한다. 요리를 먹으며 それはおいしいです(맛있어)를 남발하는 할머니, 그녀의 머리 위에 놓여진 상복과 베일을 완전히 벗는다. 그날 할머니는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난다. '금방 만날 테니, 이승의 삶을 즐기라'는 명령과 함께 말이다. 이후 그녀의 패션은 180도 변한다. 발렌시아가 풍의 패션을 한 할머니의 변신은 정말 놀랍다. 



이후 이어지는 스토리는 무미 건조할 정도로 요리의 힐링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바로 주인공 린코다. 그녀가 마음 속 깊이 증오한 엄마를 받아들이기 까지 걸리는 시간. 마치 오랜동안 푹 고아서 하얀 국물을 내는 사골처럼, 영화는 쉽게 엄마와 딸의 화해를 보여주진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일이 적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요리를 다루는 영화들이 하나같이 화해와 조화란 단어를 연상케하는 결말을 만든다는 점이다. 하긴 이건 화식을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배웠다는  인류학자들의 주장과 별 다를바 없다. 치유란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은 음식을 익히듯, 우리의 상처도 볶고 튀기고 삶아내며 살아간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에서 쉐프 박찬일은 우리가 잔혹해진 삶에 익숙해지는 건 요리와 그것을 먹는 방식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지 싶다. 회사 옆 점심시간을 버텨내는 식당의 음식은 하나같이 맛이 비슷하다. 짧은 시간에 조리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조형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각은 점차 인공감미료와 조리료 범벅의 요리에 길들여져 간다. 자연의 맛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연스레 치유할 수 있도록 자연은 인간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법이라지만, 이런 급박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맛을 통한 구원을 얻기란 요원해진다. 요리를 소재로 보여주는 영화들이 지난할 정도로 만드는 과정을 미장센에 담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이리라. 맛이 추억의 절반이듯, 우리의 치유도, 삶에 대한 긍정도 이런 작은 미각의 복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