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영화 <링컨>-정치의 미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패션 큐레이터 2013. 3. 15. 20:28

 

 


연기의 신, 다니엘 데이 루이스


어제 영화 <링컨>을 봤다. 순전히 다니엘 데이 루이스란 배우 때문이다. 함께 나온 샐리필드나 토미 리 존스까지, 이 영화는 지루할 수 있는 영화적 시간을 찬연한 연기로 매운다. 두손 두발 다 들게 만든 연기자들의 메소드 연기는, 호흡과 발성이란 기본적인 요소를 넘어, 배우가 인물을 어떻게 재현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까지 던진다. 문제는 연기에 시선을 빼앗겨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고민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지 싶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 자체로 링컨이었다. 어두컴컴한 정치적 흑막을 배경으로, 수정헌법의 통과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수사적 허세가 판치는 세상에서, 오롯하게 서 있는 링컨의 철학은, 배우의 몸을 입고서야 말씀으로 육화되기 때문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몸은 철저하게 링컨을 연기하기 위한 신체로 변해있었다. 겅중맞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명상에 빠진 듯한 목소리였다. 


링컨을 재현하기 위해 그의 습관에 대한 1년여의 철저한 연구가 배우의 행동을 통해 씨앗처럼 확 뿌려진달까. 소름이 돋는다. 그의 연기엔. 세익스피어는 배우들에게 "마음을 다스려 상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서구의 연기기법사에선 이 말은 이후 최고의 화두다. 각 공연마다 동일한 체험과 행동을 만들어내는 기술. 이러한 연기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따스한 가슴과 차가운 마음이 관건이다. 이렇게 나도 배웠다. 문제는 글로 배우는 것과 이걸 실행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겠지만. 표결의 승리를 위해 표를 구하러 다니는 세 사람의 로비스트까지, 영화는 연기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이들로 영화낭독의 종과 횡을 연결한다. 

 


영화 링컨, 미국이 신화를 만드는 방식


연기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영화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노예제도를 철폐할 수정헌법 13조의 채결을 둘러싼 갈등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한 마디로 영화 속 링컨은 우리가 어린시절 위인전에서 읽던 링컨이다. 정치가를 넘어 위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자칭 돌아가신 전임 대통령이 좋아했던 정치가란 식으로 이 영화의 아우라를 읽는 일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수파의 정치가에서 정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뭐 이런 식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링컨은 한번도 가난한 적이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내에서 링컨에 관련된 책은 1만 6천권이 넘을 만큼, 그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지만 대부분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서, 신화적 존재로서 그려질 뿐이다. 그만큼 그는 현대의 신화가 된 정치인이다.


링컨의 아버지가 지역사회에서 납세자 순위 15퍼센트에 들어가는 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맨날 가난한 링컨을 떠받든다. 가난에서 성공으로란 해묵은 문법은 미국의 신화만들기에 빠져서는 안될 구조이기 때문이리라. 경제사가인 토머스 딜로렌조는 그의 저서 <링컨의 진실-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사회평론 2003)에서 링컨을 둘러싼 신화들을 깨부순다. 링컨은 성인이 되어서도 링컨은 일리노이 주의 영악한 변호사로서 돈이 안되는 건 건들지 않았던 변호사였다. 노예주를 위한 변호를 한 적은 있어도 노예를 위한 변호를 결코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1 우리는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노예 해방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또한 문제점이 많이 읽힌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시선을 많이 담는다. 그러니 약간의 에누리도 필요할 듯 싶다. 



이 영화는 결코 무리수를 던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정치적 사안을 둘러싼 갈등관계를 풀어가는 방식, 그 속에서 링컨이 자신의 지조있는 모습과 반대파에 대한 포용까지, 철저하게 신화로 만들어진 정치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하나같이 북부는 착한 사람처럼, 노예 폐지를 반대한 남부는 나쁜 사람처럼 인식되기 쉽다. 남북전쟁도 결국은 경제전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북이나 남이나 그닥 도덕적으로 나은 건 없다. 다만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말했듯, 링컨이란 인물의 이면을 경제사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어떻게 그를 해석하는가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링컨은 재임기간 동안 이전의 미국이 70여년동안 해내지 못했던 정책-보호관세를 받아서 이를 보조금으로 북부의 경제개발과 기업에 끌어쓴 것,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중앙화폐를 발행한 것-이 그의 손을 통해 이뤄졌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남부가 피를 본 것일 뿐이다. 실제로 세원이었던 관세의 70퍼센트를 차지한 것이 남부였고, 무역이 많았던 남부는 해외에서 배를 사와야했지만 이 또한 법으로 막아 남부로서는 북부에 대해 경제적인 반대표를 던질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다. 토머스 딜로렌조는 링컨은 실제로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남북전쟁 과정에서 인디언들을 철저하게 죽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었던 것을 기술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 또한 미국사 연구 논문을 보면 각각의 입장들이 설명되어 있어, 누구의 편에 설 지는 결국 우리들의 몫으로 남는다.

 


1863년 1월 1일 위대한 노예해방령을 공표한 링컨.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남부의 노예에만 한정시킨 문제도 있고, 60만명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과연 해야 했을까의 문제도 남는다. 1840년까지 모든 노예를 해방시켰던 영국에 비해, 왜 미국은 이런 내전이란 참상을 겪어야 했는가? 여기에 대해 토머스 딜로렌즈는 남북전쟁이 실제로는 의도적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중앙집권적 정부를 만들기 위해 이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사실 남북전쟁사와 세부내역, 다양한 견해를 모두 읽어보지는 못한 터라 어떻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링컨의 모습은 로마 시대의 시저처럼, 철저하게 변하지 않는 표정 위에서 자신의 논지를 설득하고 풀어간다. 그런 연기자의 모습에 매료되어서일까? 영화는 철저하게 배우가 끌고 가는 호흡으로 사람들을 몰아놓는다.



정치의 미덕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서 시저의 침착함을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육화한 링컨의 면모 중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건 첨예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풀어가는 지난한 시간의 굴레를 견디고 감내하는 정치가의 모습일 것이다. 영화는 수정헌법의 채택이란 한 가지 문제와 이를 둘러싼 정치적 이전투구의 풍경을 돋을새김하기에, 급박하거나 스릴있는 다른 면모들은 끼어들 여지가 일절 없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샐리필드가 연기한 링컨의 아내 역, 바로 매리 토드 링컨은 짧은 순간 순간, 그녀의 일면들을 보여준다. 미국사 연구 관련 논문을 보니2 그녀는 매우 소비성향이 강한 여자였다고 한다. 


워싱턴 정가의 엘리트들과 그들의 부인이 자신을 일리노이 촌년으로 생각할까 두려웠던 그녀는 쇼핑 중독자가 되어 다양한 옷을 구매했단다. 그 금액이 법적으로 정해진 금액을 훨씬 초과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 부인이 되자마자 4일동안 3백개의 장갑을 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아들에 대한 과잉보호와 극단적 성격, 인사문제까지 관여하는 성향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단다. 정치가가 된다는 건 외부의 적과, 협상해야 할 내부의 적과, 설득해야 할 아내/남편까지 조율을 할 각오가 될 때 도전하는 게 아닐까 싶다. 미덕이 별 것이겠는가? 첨예함을 가진 모든 사안에 대해 모두에게 최적의 해법을 주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모든 정치는 '이만 하면 뭐 손해보는 셈 치고 내가 참지' 정도의 정서를 끌어내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남부출신의 정치가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표와 맞바꾸는 정치적 자리를 제공하는 그의 모습이 현대의 정치가와 뭐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어떤 색의 렌즈를 끼는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이뤄질 수 있는 영화다. 오늘 글은 욕을 먹어도 상관없다. 글을 쓰면서도 어디에 중심을 둬야 할지 나 또한 난감했으니. 난 그냥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 배우 하나 보고 다시 볼 생각이다. 




  1. 토머스 딜로렌조의 <링컨의 진실-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사회평론 발행 2003년) [본문으로]
  2. 중앙논집 22호, 건양대학교 미국사 연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