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라이프 오브 파이-삶을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패션 큐레이터 2013. 2. 18. 06:00

 

 

 

인생의 파이값, 무한하다

 

소설 <파이 이야기>를 읽은건 2009년 2월, 막 인생의 두 번째 책을 탈고하고 밀린 갤러리의 전시들을 보러 다닐 때였다. 점심을 함께 하던 동생이 선물로 사준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의 <파이 이야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을 준 녀석은 내가 참 아끼던 여자 후배였다. 결혼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이후로 나는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며 방학을 틈타 동부로 가서 이 녀석을 만났다. 결혼한 지 6개월째 섹스리스로, 교감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이 녀석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지 2년째 되던 해, 미국에서 돌아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결별했음을 암시하는 회한의 정조가 가득 묻어있곤 했다.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었다. 카드로 지은 집 같은 만남과 관계맺기, 그 속에서 자칭 '오라버니'라 불리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마음 아팠다.

 

 

 

얀 마텔의 소설을 읽는 동안 마지막 극적 반전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내 안의 나를 불렀다. 소설 속 주인공 파이는 촌스런 자신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열심히 파이값을 외운다.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사회의 위계를 조정하는 사회에서 귀족계급인 엄마와 상인계급인 아버지의 만남,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 합리적 이성을 무기로 믿는 아버지와 종교와 신앙을 삶의 자연스런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엄마, 그 속에서 파이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신앙의 방식을 찾아간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거대한 종교적 서사란 생각을 했던 건 이 부분이다. 종교를 갖고 살수 있는 이와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갈등, 그 속에서 파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답변을 찾아나간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며 살아가던 가족은 정부 보조금이 끊기자, 캐나다 이민을 위해 전 재산을 싣고 화물선에 싣고 떠난다.

 

무서운 폭풍 속에 배는 가라앉고, 구명선에 겨우 올라탄 파이만이 목숨을 건진다. 화면은 갑자기 우화적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배에 타고 있던 동물들이 속속 구명선에 올라탄 것.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얼룩말과, 하이애나, 그리고 바다나 뭉치를 타고 배에 합류한 원숭이, 하이애나는 배고픔 속에 얼룩말의 다리를 뜯고, 끝내 원숭이도 물어 죽인다. 이때 갑판에 나타난 호랑이 리차드 파커, 호랑이는 하이애나를 물어 죽인다. 이후 배 위에는 소년과 호랑이만이 남아 구조를 기다린다.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소년은 227일을 표류하며 서로의 생존을 위해 긴장한다. 배에서 발견한 생존지침서에 근거해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바다 한 가운데를 표류한다는 것, 끊없는 무한대의 세계 속 한 지점에 놓여져, 지표없이 떠다니는 삶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삶의 지표, 목표, 결과값을 위해 인간이 삶이란 전쟁에서 벌이는 투쟁의 강도를 보면 되지 싶다. 빗물을 받아먹는 법을 배우고, 바다 위에서 먹이를 구하고, 쪽잠을 잔다.

 

소년의 인생은 그 이름 만큼이나, 무한대로 펼쳐지는 원주율의 값처럼 무량수변의 실루엣을 그린다. 이 영화는 고도의 은유로 가득차 있는 세계다. 물론 그 세계는 적어도 영화 속 펼쳐지는 이야기에 내 의심을 잠시 보류하고, 흠뻑 빠져들때라야 가능한 은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야기의 진위성을 믿는 건 나의 믿음의 빛깔에서 시작된다. 막막함 속에서도, 기도의 힘은 발휘된다. 비가 오고, 때아닌 날치때가 날아다니며 자동적으로 먹이가 되어준다. 마치 40년을 광야에서 해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처럼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미어캣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라. 낯은 천국이지만 밤만 되면 모든 자연이 강력한 독을 품어내는 통에, 이곳저곳으로 숨어 들어간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맑은 물로 가득한 세상인 줄 알았던 이곳이 바다 한 가운데 보다 무서운 세계였던 것. 작가 얀 마텔은 소설 속에서 각 소재로 사용한 세계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잔혹함을 우아하게 드러낸다. 예전 읽었던 과학책에서 원숭이들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알고보니 원숭이가 먹은 과일과 풀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명에 의하면 숲에 사는 나무들도 자신이 동물들에게 먹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독을 품는단다. 나는 이 말이 참 무서웠다. 우리는 공존이란 말을 참 쉽게 한다. 그 과정에서 숲의 군생과 삶을 이야기 한다. 모든게 조화로울 것 같은 세계, 그러나 그 속에서도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들 조차도 독을 품는단다. 그 삶은 인간과 자연이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독을 품고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최소한의 방어는 할 줄 아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종교가 가진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의 기도가 막히고, 우리의 희망이 봉쇄될 때, 인간은 과연 무엇에 의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다.

 

 

삶은 그래도 지속된다.

 

인간의 삶이 정글 속 동물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일종의 단념 속에서 영화를 보려는 순간, 메시지는 다시 한번 우리를 다독인다. 그러한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의 용기일 것이다. 리차드 파크는 어찌보면 우리 안에 있는 마지막 표효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을 거다. 하이애나 같은 자들이 다친 채 끙끙거리는 얼룩말을 잡아먹는 세계가 자연스럽듯, 그 하이애나를 물리칠 수 있는 무력과 지력, 현명함과 도덕성을 갖춘 강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삶이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하듯,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조형하며 구슬리며, 연단시키며 하루하루 생을 살아가는 우리다. 참 강해져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엔 생각보다 하이애나 같은 자들이 참 많다. 철저한 자기자신의 욕망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자들, 여기에 무감각까지 더해져, 타인의 상처와 아픔엔 아랑곳 하지 않는 자들. 이런 이들이 정치권력과 금권을 쥘 때, 지배당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위안과 힐링, 인내를 통한 견딤'이다. 물론 이 세가지 가치와 태도는 삶에서 중요한 결과값을 내지만, 여기에만 의지해서도 안된다. 우리에겐 리차드 파크같은 강력한 연대의 힘 또한,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강력한 야성도 키워야 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된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다른데 있지 않다. 인생이란 거대한 시나리오를, 그 이야기의 전개과정과 빛깔은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갖는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일거다. 말하기보다 행함이 좀처럼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래도 작은 위안의 한 조각을 얻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