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지금 이 순간이 환희다-영화<미드나잇 인 파리>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7. 10. 23:29

 

 

 

 

우디앨런, 타임슬립에 빠지다

 

오랜만이다. 영화감독 우디앨런의 영화를 만난지가 언제였던가. 뉴요커들을 위한 진득한 유모와 날카로움을 자랑하던 감독은 언제부터인가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에 눈을 돌린다. 이번에 개봉한 <미드나잇 인 파리>도 세월과 함께 따스한 연민과 웃음을 지니게 된 감독의 면모가 잘 묻어난다. 소설가 길과 약혼녀 이네즈는 결혼을 앞두고 파리여행길에 나선다. 소설가 길(오웬 윌슨)은 파리의 고적한 낭만을 즐기고 싶은 자신과 달리, 파리의 화려함만 만끽하려는 이네즈와 사사건건 부딛친다. 게다가 그녀의 부모는 철저한 신자유주의의 신봉자. 서로에 대한 정서적인 불편함을 안고 지내던 어느날,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12시 종각소리와 더불어 나타나는 클래식 푸조 자동차에 올라탄다. 그가 도착한 곳은 1920년대 과거의 파리다. 길은 가장 '아름다운 파리의 시절'이라 생각한 시대로 시간 이동을 한다.

 

 

파리를 읽는 두 개의 시선

 

길과 이네즈, 이 연인이 파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하게 현재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면모를 둘러싼 사람들의 오해와 환상을 대표한다. 과거의 역사성과 현재의 럭셔리, 어찌보면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일상을 지배하는 프랑스발 철학과 럭셔리 제품들의 본산지가 아닌가? 부르주아들의 기만과 위선을 고발해왔던 우디앨런은 이제 그 시선을 파리를 둘러싼 우리들의 '환영'으로 돌린다. 우리들은 '그때가 좋았지'란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여기서 그때란 바로 과거의 시점이다. 현재에 대한 불만과 위무가 필요할 때, 우리는 과거의 특정 시점을 인간들의 '황금시대'라고 지칭한다. 자신이 만든 황금시대에 대한 착각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과거로의 환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묻는다. 소설가 길은 헐리우드에서 촉망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야기꾼이다. 그는 영화 시나리오 대신 진중한 소설을 택하기로 한다. 이러한 생의 경로들은 부유한 장인과 장모에겐 부질없는 짓일 뿐. 연인들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경제적 관점과 입장에 따라 충돌한다. 길을 달래주는 것은 오로지 1920년대의 황금시대다. 그는 이제 1920년대로 돌아가 그곳에서 텍스트를 통해서, 혹은 그림을 통해서 만났던 이들을 실제로 만난다. 헤밍웨이를 만나고, TS 엘리어트와 피카소,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이자 작가, 컬렉터였던 거르트루트 슈타인도 만난다. 살바도르 달리와 사진작가 만레이, 영화감독 루이 부뉘엘, 당시 뉴욕 출신으로 파리에 건거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선두가 되었던 앨리스 토클라스, 흑인출신의 안무가이자 무용수였던 조세핀 베이커,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콜 폴터 등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주요 인물을 모두 만난다.

 

요즘 타임슬립이 드라마의 대세라지만, 우디앨런까지도 이 코드를 쓸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코 지저분하게 사람들과의 만남을 나열하진 않는다. 아마도 감독 또한 이 시대를 자신의 사유가 출발한 모종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껏 우디앨런이 보여준 영상미학의 핵심에는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보여준 도시에 대한 생각, 거부와 저항, 자본에 대한 비판의식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철저하게 자본가의 생리를 대변하는 장인과 장모, 그 속에서 자란 이네스(레이첼 맥아담스)는 그저 현학적이고 고급학위나 나열하며 틀린 지식을 당차게 주장하는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끌릴 뿐이다.

 

 

하긴 타임슬립이란 코드가 등장하는 것도, 어찌보면 현실에 대한 지독한 불만이란 심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항상 지나온 날들은 아름답고, 아니 그렇게 포장하고 싶은게 인간이기에,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정당성은 항상 과거의 시제를 통해 더욱 생생한 살을 입게 되는 것일 거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 소설가 길, 그녀와 함께 거니는 파리란 도시는 참 단아하고 예쁘다. 내가 좋아하는 1920년대 여성들의 패션도 눈부시다. 여성들이 최초로 자신의 헤어 스타일을 통제하기 시작한 시대, 단발과 더불어 뱅헤어의 원조가 되었던 시대가 아닌가? 다소 톰보이같은 여자들이 등장하며 전통적인 여성성과 작별했던 시대, 그래서인지 유독 복식사에서도 이 시대는 황금시대로 각인된다.

 

 

위의 인물은 소설가 피츠제럴드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1920년대 우리 시대의 브란젤리나 커플로 불리던 그는 영화 속에서 자신의 속을 열심히 긁어대던 연인과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정말 많은 예술가들의 초상이 등장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로 세계를 경악시켰던 배우 에드리안 브로디가 연기한 살바도르 달리는 정말 화가 그 자신이 현현한 듯한 환상을 부여한다. 마른 외양과 콧수염, 여기에 화법까지, 철저하게 브로디는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를 연기한다. 어디 이뿐인가? 아래 사진 속 관광 가이드 역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카를라 부르니다.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출연한다. 우디앨런의 마당발은 그대로 영화 속에 투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디 앨런의 뛰어난 연출력은 온갖 문화적 용례들을 다 뒤섞는 절묘한 혼성화 전략 속에서 균형을 놓치지 않는 데 있다. 너저분한 느낌, 잉여의 느낌을 화면 속에 담지 않는 다는 것. 각자 그 시대의 예술가들의 표정을 좀 더 생생하게 담아내느라, 연기자들이 힘이 들었겠지만 이는 관객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축복이다. 

 

 

우리는 흔히 지금보다, 과거의 생생했던 기억에 의거해 재구성해온 세상에 더욱 끌린다. 우리에겐 과거는 각박하고 비루한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었고 황금빛 추억의 저장고인 셈이다. 우디앨런은 이런 관점을 황금시대의 환영(illusion of golden age)라고 명칭한다. 이런 관점에선 항상 과거는 우선권을 갖는다. 극 속에서 길과 사랑에 빠진 애드리아나에게 황금의 시대는 1880년대, 바로 벨 에포크라 불리던 시대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황금시대라 생각하는 자신만의 시대가 있다. 더 재미있는 건 벨 에포크의 시대로 다시 타임슬립을 해서 만난 마네와 고흐, 드가와 같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르네상스'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당신의 황금시대는 언제인가라고. 그러나 바로 지금이야 말로 우리들의 황금시대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 현재를 지나치게 부정하지도 말며, 과거를 추앙하지도 말며, 그저 이 현실의 풍성함을 만끽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답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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