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Healing/마음 미술관

독야청청한 인생을 살기-소나무 앞에서 솔로로 사는 법을 배우다

패션 큐레이터 2013. 1. 25. 21:37


어제 부암동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에 갔다. 대구에서 지인이 올라오셔서

이번 자하문로 쪽에 새로 생긴 리안 갤러리란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린 후, 이후 

서울 미술관에 마실을 간 것이다. 개관전 이후 오랜만에 가본다. 늦은 겨울 오후 석파정을

을 먼저 거닐었다. 이곳에서 전시중인 문봉선 화가의 <독야청청>전은 석파정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것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이 곳을 걷다보니, 인왕산 자락의 겨울 풍경들이

고즈넉하게 눈 속에 다 들어온다. 소나무 군락 사이로 보이는 수묵빛 산들의 

실루엣도 곱다. 핍진한 겨울의 시간 속에서 푸름을 놓지 않는 나무들.



겨울 한 나절, 석파정 곳곳을 걷기에 날씨가 갑자기 을씨년해졌다.

올해는 유독 날씨가 예측가능하기가 어렵다. 한기와 온기를 오가는 유난한

변뎍스러움이, 그림을 보는 내내, 내 삶을 짓고 움직이는 정서의 태도와 다르지 않음

을 느끼고 반성해본다. 황지우의 소나무에 대한 예배란 시를 떠올리기도 했다. 



화가 문봉선의 소나무는 오로지 흑백으로만 표현된다. 수묵의 전통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시장에서도 그다지 매력없는 품목으로 전락할 때도 작가는

철저할 정도로 전통의 기법을 되살리고, 그 속에서 현대적인 실루엣을 가진 소나무를 다시

우리들에게 재현해 보여준다. 서울 미술관의 전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닥면의 매끈한 측면이

조명 때문에 마치 소나무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 듯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놀라왔다. 



문봉선의 독야청청 전. 흑백의 힘으로 품어내는 수묵의 힘이 놀랍다. 

수묵빛 어둠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란한 빛이 사라지고, 색이 

사라질 때 핍진하게 앙상한 가지로 남는 겨울나무가 '영양과잉'의 시대를 매절하듯, 소나무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소나무는 기다릴 줄 알고, 멀리볼 줄 알고,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안다고 

동양화론은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건 정신을 통해 사유하는 몽상가의 몫일 뿐. 실제로 

소나무도 여느 나무처럼 치열하게 산다. 벌레들에게 물리면 송진을 내어 치유하고, 

벌레들이 끼지 않도록 강한 산성을 토하기도 한다는 주장이 놀랍기만 했다.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건, 원숭이가 

나무를 실수로 타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과일을 맺는 나무가 강력한 

독성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먹는 원숭이는 순간, 

중독상태가 되어 균형감을 잃는다. 나로선 자연의 작은 디테일이며 이치이건만 놀라운 사실이었다. 

나무도 자신이 상처받는 걸 싫어하고, 그 아픔을 막기위해 독을 품는구나 했다. 그러니

나무 앞에서 모든 걸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상징으로만 읽어온 건, 결국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일지도 모른다. 가진자들이 힘없고 밟힌 자들에게 바치는 

인생의 헌사같은 정치적 수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독야청청. 그림 앞에 섰다. 사람들은 독야청청의 상태를 어떻게 바라볼까? 

누군가는 친구가 없다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맑고 투명해서 물고기가 안산다는

이들도 있고, 연대와 사회적 공존을 의미한다며 강력하게외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없다

보는 쪽에게는. 외로운 것과 홀로있음은 다른 것임을 말해주고 싶었고,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산다는 

말씀을 하는 이들에겐, 그건 생태계를 자신들이 더럽혀 놓고, 타인들에게 공범의식을 덧씌우려는 것

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며 연대와 사회적 공존을 외치는 이들에겐, 세상은 결국 개인으로 

환원된 존재에 대해, 진정한 껴안음이 없이 사회만 이야기하는 이들은 수사학의 늪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 소나무에게 물어봐야 할 인생의 사안이 아닐까 싶다.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이 지표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건목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황지우의 시어 속 소나무의 광경과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나무를 보면서 누군가 내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이들을

떠올려 봤다. 최근에 그랬다. 적어도 이 패션계라 불리는 허접한

곳에서 난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껏 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떠올려볼 바가 없고

그 모임의 다른 이를 만나 분명히 입장을 정했다. 나는 취미생활을 영업하듯

할 수 없다는 것도 말씀드렸다. 사람에게 치이기 싫어 옷이라는 오브제를 선택한 내가

옷으로 인해 인간의 숲에서 다시 한번 아프기는 두렵기도 한 문제이기도 하고.



이날 함께 해주셨던 멋진 분이 계시다. 파버 카스텔 한국 대표이신 

이봉기 선생님이다. 이분께 진심으로 배운 것이 있다. 좋은 조언을 주셨다. 

'사람에게 치이지 말고 시각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눈에 담아두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점이다. 이것이야 말로 독야청청일 것이다. 나는 홀로있음과 고독의 

여백을 누리지만, 그 여백을 채우는 예술의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블로그를 10년 전 시작하게 된 것도, 시네키드로 살아왔던 내 모습을 

지 않고 싶어서였지 않은가. 소나무 앞에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꺼내본다. 

어떤 기억은 지층이 되고 화석이 된다. 그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기억은 보석이 

되는 법이다. 보석같은 분들을 최근에 많이 만났다. 세상에는 멋진 분들이 참 많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꿈꾸게 하는 토대가 된다. 행복한 하루를 산책과 그림 읽기에

썼다. 남자 인생, 이만하면 하루의 행복을 꾸려낸 샘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