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가로수길에 있는 패션 스쿨 에스모드 서울에 다녀왔다.
<Focus on Style>전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 발표회, 독특하다. 에스모드
서울 2학년 학생 100명이 그룹 작업을 통해 만든 크리에이티브한 16개 브랜드가 선보였다.
처음엔 그냥 학생 발표회려니 했다. 하지만 그 성격은 사뭇 달랐다. 패션전문학교다운 풍모가 녹아있다.
커머셜과 아트, 두 세계를 넘나드는 셔틀로서의 패션. 각 팀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패션계의
바이어들과 관련자들을 모아 '어떤 브랜드를 사시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꽤나
도발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돌직구 같은 질문 앞에서, 한국식 패션교육기관의
방식들을 다시 되살펴본다. 우리나라는 학생들에게 참 관심이 없다.
버려진 군용 텐트를 리사이클한 밀리터리 느낌의 브랜드, 착용자가
원하는 형태와 볼륨으로 직접 옷을 연출해 입을 수 있는 DIY 브랜드, 동물의 포즈와
프린트를 모티프로 한 스트리트 브랜드 건담 로보트를 주제로 구조적인 크로스 코디가 가능한
브랜드 등 학생들 특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만든 의상 작품 삼백 여 점이 전시되었다. 흡사 백화점의
브랜드들이 경합하는 분위기다. 결국 소비자들의 요구에 학생들의 실험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기성 디자인에서 볼 수 없는 참신함과 열정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
들을 발굴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다. 각종 콘테스트도 별별 잡음에 물릴 때가 있다.
가장 좋은 건, 기업이 민간 학교들의 디자인 탤런트를 직접 찾는 일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디자인 학교들은 이 방식을 쓴다.
디자이너를 입도선매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언뜻 입도선매란 단어의
뉘앙스때문에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2학년 학생들이 한창 선을 배우는
시기, 그의 창의성들이 어떤 방향으로 발현될지를 엿볼 수 있다. 나 또한 아트 컬렉터로 살아
가는 동안, 미대 학생들의 2학년 2학기말 드로잉을 유심히보고 심사평을 듣곤 했다. 화가에게 드로잉이라
향후 그의 미래가 보이는 문화적 DNA다. 패션에선 이 시기의 작품들과 이를 전개하는 과정, 상상력이
평생 디자이너로 살아갈 행보의 풍경을 압축한다. 일종의 지문같은 것이다. 그러니 볼 수밖에.
군복으로 만든 새로운 느낌의 밀리터리룩은 LAP 브랜드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심리스 봉제와 에나멜과 아크릴과 같은 다양한 소재 위에 누빔기술을 이용한 것도
눈에 들었다. 더플백 손잡이를 코트 등판에 달아 옷을 걸 수 있게 한 것도
옷을 통해 표현해 낼 수 있는 즐거운 상상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팀의 작업도 흥미롭다. 난 항상 이질적 소재를 결합하는 상상력에
점수를 부여하는 편이다. 이는 단순히 현대미술에서 혼종성을 띠는 것들을 소화하고
개념화하는 작업을 우선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세계를 껴안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다른 소재를 쓴다는 것은, 또 다른 소재개발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중으로 힘든 작업이다.
무광택과 광택의 역설을 옷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두 세계의 만남이 궁금했다.
니트와 저지의 결합, 그 저지를 골이깊은 니트와 어울리게 하도록
특수 처리와 염색을 했다. 가방 부자재를 옷에 달거나 다양한 절개선을 통해
디자인을 전개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에서 '혼합매체'를 이용한 설치와 작업이 있듯
패션은 항상 다른 세계를 껴안아, 그 속의 인간을 보호하는 법이다.
이번 포커스 온 스타일 전에서 가장 상을 많이 받은 팀이다. 테마는 폴리미노
Polyomino 즉 다각적으로 변화하는 도형이란 뜻이다. 전등이나 테이블, 카페트, 의자 등의
오브제의 형태를 그대로 입체로 패턴화하여 옷에 새로운 조형성을 불어넣었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전등의 원형실루엣을 사용, 원피스의 볼륨감을 표현하거나 네오프렌에 저지를 본딩한
소재개바을 적용, 홑겹으로 가볍게 입으면서도 특유의 볼륨감을 유지한 점은 놀랍다.
입체와 평면을 동시에 전개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우연의 효과에 눈을 돌린 점도 나로서는 아주 큰 배점을 줄 포인트였다.
각 옷을 도형의 실루엣을 통해 만들었지만, 입는 주체가 어떻게 접고, 잠그고 두르는가
따라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요즘 패션연출의 대세가 된 자기 조형성(Self-Sculpture)을 실현한
학생 작품이지만, 시장의 요구에도 적합한데다, 소비자들의 개성 욕구를 잘 살려냈다는 점에서 다른 바이어들
에게도 높은 점수를 받았지 싶다. DNUE상, SIECLE상, 신세계백화점 바이어상, 패션 프레스상, 이외에도 많은 관심을
받은 팀이다. 훅과 지퍼를 이용 다른 형태로 연출이 가능한 팬츠, 두 가지 형태의 케이프로 입을 수 있는 패딩
스커트 등 무한변주가 가능한 연출의 장을 옷을 통해 보여 준다는 점은 크게 살만하다. 단, 상품화하고
양산과정에 들어갈 때, 고쳐야 할 점들도 눈에 보였다. 의복구성상의 취약점들이 보여서 이는
학생들에게 조금씩 설명을 들으면서 이야기 해줬다. 더 나아지겠지.
처음엔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프리즈를 전개한 방식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의자를 포갠 형태로 서구의 버슬 스타일 스커트를 변주한 것은 아주 인상깊었다.
학생들에게 그 자리에서 함부로 명함을 주지 않는 나인데, 앞으로 연락하자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 팀 구성원들과 그들의 행보를 지켜볼 것이다.
색실 누비라는 한국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옷에 적용한
학생들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문안하면서도, 백화점에서 좋아할 만한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단 편집샵에서. 디자인과 가격을 소비자가 직접 결정하는 마케팅 컨셉을 가진
브랜드다. 자석을 이용, 다양한 색채의 종이접기 디테일을 옷에 붙여낼 수도 있다. 독특하다.
평면재단 자체를 접거나 펼쳐서 소비자가 자신의 연출 스타일대로 입게 하는 곳이다. 현대백화점 바이어상을
받았는데, 난 개인적으로 창의성은 인정하지만, 옷의 견고함이나 양산의 문제, 무엇보다 소비자
클레임이 걸릴 수 있는 옷의 단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브랜드다.
동물 프린트를 찍는 데서 끝내지 않고 옷의 소매나 절개부분을
동물의 관절형태로 뽑아낸 재미있는 작품도 있었다.
PAUL & ALICE 상을 받은 팀의 작품들이다. 이 브랜드에는 스토리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샤론이다. 여성 캐릭터를 직접 개발, 우주여행을 하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을 생생하고 역동적인 일러스트 프린트로 풀어냈다. 스트리트 브랜드로 기억해둠직 했다.
복식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팀도 아무 마음에 들었다.
고딕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브랜드라고 했다. 3차원을 구성하는
X.Y.Z 축을 이용해 3차원 의상을 디자인한다는 의미다. 고딕시대의 수직적인 첨탑과
그 속의 마치 인간의 갈빗살 같은 궁륭의 형태, 리브 볼트, 아치 등 다양한 요소를
패션으로 풀었고, 고딕시대의 정서를 담듯 올 블랙 컬러로 시도를 했다.
데님 위에 필름지를 붙인 후, 락스를 묻힌 붓으로 표면에 그림을 그려
섬세하게 워싱 효과를 준 것이 눈에 띄었다. 패션은 끊임없는 소재개발을 바탕으로
새로운 옷의 정신과 그 얼개를 그려간다. 그런 점에서 건축물의 실루엣을 녹인
옷도 좋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변주된 방식들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작품들을 볼 때마다 복식의 역사를 가르치온 보람이 느껴진다.
한국의 대학에서 시행되는 복식사와 달리, 다른 방식과 이야기, 문화사와 인류학을
곁들여 풀어내는 패션사 수업을 앞으로도 더욱 심도깊게 해 나가려고 한다.
올 블랙의 미감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브랜드의 콘셉트이다.
윙수트를 모티프로 하여 아이템들을 모두 변형해가며 입을 수 있는
스포츠 캐주얼 브랜드. 지퍼로 연결되어 있는 바디수트의 소매를 떼면 팬츠 한 벌이
되고, 상의 부분만 떼면 아우터로 입는 등 한 벌이 8개 옷으로 변형된다. 하늘과 구름 이미지를
프린트로 개발해 전체적으로 모든 아이템에 적용하였다. 스트링을 달아 볼륨 조정이 가능하고 방수
방풍 기능의 폴리 소재를 사용해 기능성을 높였다. 바야흐로 윙수트가 패션언어의 한 분야로
침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브랜드다. 학생들의 전시를 보는 날은 항상 마음이 좋다.
더 노력해야지, 아이들이 나갈 세상을 더욱 환하게 만들고 싶다는 용기도 생긴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로 가는 길목 나무 가지 마다 걸린 만추의 시간을
학생들이 보여준 창의성의 앙금을 새기며 보낸다.....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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