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을 위한 변명
공지영의 표절논란으로 트위터가 뜨겁다. 그녀의 근작 논픽션, <의자놀이>에서 시인이자 노동운동가인 하종강씨의 글을 인용했으나 출처를 본문에 넣지 않고 미주로 처리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하종강씨의 글에도 이선옥이란 르포작가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있었고 하종강씨는 이를 원래 글에서 밝혔다는 점. 공지영은 이를 확인하지 않고 글로 옮겼던 것 같다.
이에 시인은 출판사에 이 문제를 지적하고 본문 출처표시와 더불어 이선옥 작가의 이름을 함께 실어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고, 이와 함께 공지영씨의 사과를 요구한 모양이다. 여기까지 봐서는 그리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공지영씨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것이 '편집자가 임의로 미주처리 한 것'이란 말의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도 미술책을 쓰는 작가로서, 다양한 출판사들과 작업을 해봤다. <하하미술관>을 낸 미래인도 있고 <샤넬 미술관에 가다>를 했던 미술문화사, 디자이너 작품론을 프로젝트로 하기로 한 위즈덤하우스나, 잘 나가는 문학동네도 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이 나라 출판사 에디터들은 툭하면 '글을 읽다보면 감정선이 흐려진다' 혹은 '감정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라는 둥의 말을 하면서 인용한 글의 출처들을 툭하면 뒤로 빼서 박는다. 물론 내 글을 그렇게 했다는 건 아니고. 나는 기본적으로 미술책을 쓰고 에세이류를 쓰기에 소설과 달라서 다른 접근방식의 에디터십을 필요하긴 하다. 하나같이 소설이나 논픽션을 손보고 다룰 때, 감정선이 떨어진다 혹은 몰입도에 방해가 된다는 말만 할 줄 알았지 논리의 근거를 제대로 대는 에디터는 만나본 적이 없다.
문화권력과 공주병 사이
사과요구를 하는 시인 하종강을 향해 "언제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 내가 너무 단순한가? 정말 무섭다. 겉으론 위선을 떨고 다니겠지. 내면으로는 온갖 명예욕과 영웅심 그리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남의 헌신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진심인 없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주장하며 시인 하종강을 '운동 내부의 적'으로 비난하고 화인을 찍는다. 더 나아가 “재능이 없으면 쿨하기라도 해야한다” 는 살리에르의 말을 리트윗 하면서 직접적으로 하 시인을 빈정대기 시작한다. 사실 작가로서 표절과 관련된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가장 치욕적인 사건임을 생각해볼 때, 적어도 르포르타주란 글쓰기 양식을 처음 시도한 공지영 작가의 오류를 누구보다 감싸줄 생각이 있었다. 작가 스스로도 '몰랐다'고 인정을 했고 말이다. 문제는 이후에 펼쳐진 대응방식에서 보여준 공지영 작가의 태도다.
이런 문제는 사실 공지영씨가 출판사에 이야기 해서 2쇄부터 바로 잡고, '본의 아니게(실제로 그녀는 이선옥씨의 글인줄 몰랐다고 했으니) 심려를 끼쳤다. 죄송하다' 했으면 깔끔하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는 거다. 책 내봐야 겨우 7쇄 정도에 머무는 나같은 작가도 독자의 정정요구를 전화해서 바로잡는다. 공지영 같은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먹고 사는 대작가가 이러면 안되지 싶다. 그녀야 말로 쿨하게 사과해도 되는 문제 아니었나? 속이 상하는 쪽이야 자신의 글을 인용 당한 쪽일테고 그러니 이런 사례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문화권력이란 수사를 들이대서 공지영을 탓한 모양이다.
공지영의 대응태도는 트위터 상에서 시간을 지나며 점입가경이 된다. 2쇄 부터 인용문을 없애고 자신이 쓴 부분으로 하기로 했다면서 '내가 쓴게 더 낫네' 라는 식의 소리나 하고 있으니, 그녀에 대한 두 당사자의 감정이 좋아질 리 없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을 시기와 질투심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르포르타주를 쓰면서 그녀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장을 돌아다니며, 글과 싸움을 벌였다. 나도 인정한다. 쌍용자동차 파업사태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을 글로 위무하려 했던 그녀의 대의를. 그런데 그녀는 툭하면 자신의 대의 만을 인정해 달라고 말하면서 '작은실수'를 범한 것을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대의를 위해 소의는 지워져도, 혹은 배제되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왜 예술가들이 세월이 들어가면서, 패권에 메이고, 자신들에게 '우쭈주' 하는 이들만 좋아하게 되는지. 공지영이 아니어도 이렇게 변해간 많은 문화예술가들을 봤다. 세월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저 온건히 이해받고 싶을 것이고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의 사태에서 공지영 작가의 반응태도에 섭섭한 모양이다. 공지영 너마저의 정서랄까. 적어도 그녀의 글과 작품이 한국사회의 차가운 단면을 돋을새김하고 신랄함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믿었던 나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공지영의 한없는 천박함에 가까운 '멘붕'상태에 화가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지영의 헌신, 왜 헌 신이 되었나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쿨하게 사과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을, 대의를 들먹이며 공격전선을 펼칠수록, 그녀가 말하는 대의를 위한 헌신, 그 투명한 창에 서리가 어둑시근하게 끼게 된다는 걸 왜 모를까? 언제부터 이렇게 공지영 작가는 문화권력이 주는 소아병에 걸렸단 말인가. 속이 상한다. 게다가 다른 책이지만 삽화 그려준 작가가 고료를 지불받지 못해서 억울함을 표현하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 이걸 갖고 출판사의 못된 행태에 대해 비판하기 보다, 그저 자신의 책을 내준 출판사란 이유로 출판사를 옹호하는 행위는 썩 마뜩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건 지금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삶의 누적된 상처로 썩아가는 마음을 겨우 핥아가며 살아가는 쌍용 자동차의 식구들이 아닌가 말이다. 책을 통해 짐승의 시간을 버텨낸 이들의 기록을 읽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는 일, 중요하다. 그러나 더불어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빚을 진 이들이 많다는 걸 공 작가도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잘 들 풀어가셨으면 좋겠다.
공지영은 첫 생의 르포르타주를 통해 빚을 갚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의 이야기로 부터 아이디어 구상과 글 쓰기의 영감에 이르는 전 과정의 빚을 졌다. 그 과정에서 들어간 타자들의 다른 인터뷰와 글도 마찬가지다.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의자놀이>를 읽으며 엉뚱한 생각에 빠졌다. 의자를 잡은 쪽과 잃어버린 쪽의 투쟁에는 어린시절 소풍 갈 때마다 줄기차게 하던 의자놀이의 환영이 각인되어 있다. 자신의 책을 팔 때마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커진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글을 통해 세상에 눈뜬 이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공지영 작가가 자칫 자신의 글쓰기가 노동자와의 연대가 아닌 시혜를 베푸는 행동으로 착각하지 않길 바람한다. 자신의 시혜적 관점이야 말로 높은 곳에서 노동자들의 의자놀이를 바라보며 비웃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대를 위해 잘못된 것을 질정해달라고 주장하는 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과 우리는 같은 의자에 앉아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 작가께서 이 정도는 꼭 해주시리라 믿는다. 아무렴 공지영이니까. *** 이렇게 글을 쓰고 난후 공지영은 간단하게 사과한 후 트위터를 잠시 접는다는 소식만 전했다. 물론 하종강과 이선옥, 두 사람에 대한 사과도 전했다. 일절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지만, 하종강 선생 측은 오히려 이 문제의 확전을 피하며 정리 수순을 밟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다만 공지영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출판사와 독자들이 익명의 힘을 빌어 지속적인 싸움질을 벌일 뿐. 공지영은 참 든든하겠다 싶다. 이런 팬덤이 있어서. 누가 뭐래도 표절건과 관련된 이 사안은 뒤집어질 수 없다. 그렇게 정당성을 떠벌일 수 있었다면 사과하지 말았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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