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시인 도종환을 위한 한 장의 그림-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패션 큐레이터 2012. 7. 10. 10:24

 

 

 

장 레옹 제롬 <흑인 시인> 1888년 캔버스에 유채

 

기준없는 사회가 만드는 폭력의 형식

인터넷이 뜨겁다. 시인 도종환 선생의 작품을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이 교과서에서 삭제키로 한 문제 때문이다. 현 정권 들어 문화예술계의 수장들을 자신의 입맛으로 바꾼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이후 국지적인 저항들이 이어졌다. 교육과정 평가원은 말기암의 중증환자처럼, 그 치부를 선연하게 드러내며 으뭉스레 정권의 코드를 이어가고 있다. 도종환 시인과 관련된 이번 사안도 마찬가지다. 뉴라이트의 열혈 지지자인 서울대 박효종 교수의 윤리교과서 대표집필에 대해선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유독 시인에게만 들이대는 잣대가 모호하다. 정치색과 이념적 편향성을 문학 작품에서 배제하려는 노력 자체를 폄하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이 기준을 적용하는 대상에 관한 문제다. 그들이 주장하는 교과서 검정기준에서 '교육의 중립성 유지'라는 항목이 있다. 말 그대로 '교육내용은 특정 정당, 종교, 인물, 인종, 상품, 기관 등을 선전하거나 비방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중립성 유지라는 기준 자체는 언어자체로는 유의미하다. 단 중립성이란 기준의 판단을 평가원장이 임명한 심의회가 한다는 점. 무엇보다 그 심의회야 말로 정치적 기준을 선연하게 드러내는, 자칭 입맛에 따라 구성되는 단체라는 게 문제일터.

 

흔들리며 피는 꽃을 꺽는 사회

현재 교과서에 실린 도종환 시인의 작품은 '담쟁이' '흔들리며 피는 꽃' '종례시간' '여백' '수제비' 등 5편의 시와 2편의 산문 등 모두 7편. 도종환 시인을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그때 난 학교 앞 작은 서점에 한 켠에 놓여진 '접시꽃 당신'이란 시집을 발견하고선 물끄러니 활자들을 읽어보았다. 따스한 언어로 표현된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가 사랑에 대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한동안 생각하고 지냈다. 이번에 문제가 되었다는 시 중 <종례시간>을 보자. 이 시의 핵심은 하나다. 종례 후 학교에 가서 바로 "집안에만 갖혀 있지말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라"다. 사물과의 대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기계적인 감수성과 지식, 이 땅의 획일화된 교육이 지속적으로 끼친 폭력의 방식이다. 시인은 아이들에게 따스하게 조언한다. 나무들을 껴안고 분꽃에 입맞추고, 개울물 허리를 껴안으며 지내보라고. 도대체 이 시편이 왜 정치적인 색채를 띤다고 평가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아무리 읽어도 그냥 한편의 동시같다.

 

민주화 과정에서 외로운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투신했던 화가는 세월이 지나면서 교육자로서, 시인으로서 정치운동이 빠질 수 있는 도그마도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 새롭게 재편해냈던 시인이었다. 시인의 여린 감성은 운동을 향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에 대해 말해주었고, 운동의 현실 앞에서 좌절하며 떠나고 옆에 섰던 이들마저 먼발치로 돌아서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겨울 금강>을 걸으며 자신을 되집었다. 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읽어보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국회의원이 되기 오래 전에 발표된 시 조차도, 현재의 관점에서 정치색을 띤 것으로 폄하되어야 한다면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의 방식대로 처리하라고. 그리고 현재 새누리당과 지난 한나라당을 위해 문학을 프로파간다로 사용한 이들 또한 중죄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칫 민주주의가 '경합하는 가치들이 끊임없는 타협과 갈등해결을 통해 나아가는' 체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문열이 특정 정파를 위해 글을 쓰고 지지선언을 할 때도 온라인은 뜨거웠지만, 그의 작품을 교과서 자체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하진 않았다. 이는 상이한 가치를 가진 이들의 글이 공존할 수 있을 때, 교과서의 생생함이, 교육의 날선 균형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일 터.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 가?

오늘 교육과정평가원을 위해 걸어놓은 한 장의 그림은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프랑스의 화가 장 레옹 제롬의 <흑인 시인>이다. 그는 서구의 관점에서 동양의 풍경과 물상을 그렸다. 이는 서구인의 전형적인 시선과 관점이 오롯하게 배어난다. 그만큼 식민주의적 시선을 그대로 투영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 속 시인의 모습에는 결코 궁핍한 시대를 살되 비루하지 않은 당당함이 스며들어 있다. 서구인들을 통해 철저하게 배제된 아랍과 유색인종이란 두 개의 딜레마를 껴안은 그림,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인의 정신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치자빛, 분홍빛, 청신한 블루가 화면을 채운다. 시인의 겉옷은 여전히 세상을 따스하게, 밝은 색감으로 바라보려는 정신의 렌즈가 아닐까 싶다. 청색의 외벽을 보라. 마치 시인의 펄떡펄떡거리는 날것의 정신을 표상하듯, 시원하게 우리의 눈을 젖게 하지 않는가. 시인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죽은 언어로 사유하고, 죽은 사유로 붕괴된 세상의 얼개를 하릴없이 짜맞추며 허송세월할 때, 살아있는 정신의 언어를 포획하고 끄집어 냄으로써, 시대의 감성을 벼리는 이들이라고. 도종환을 둘러싼 논란들은 그런 점에서, 흔들리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 송이의 꽃을 꺽는 폭력이며, 그 꽃향기에 함께 취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소망을 잡아 찢어놓는 행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