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호 <신의 영역> 피그먼트 프린트 24.7×33cm 2011
우리 시대 '신의 영역'은 무엇인가
한국의 검찰이 올해 유행시킨 말. 바로 '신의 영역' 이란 표현이다. 기소를 청탁한 자의 통화조회여부는 신의 영역이고, 양심선언을 한 검사의 사의만 조사대상이 되는 참 아이러니한 사회다. 나꼼수의 주진우 기자를 둘러싼 검찰의 조사가 활성화되려는 순간, 방송을 통해 밝혀진 박은정 검사의 양심선언. 검찰 게시판은 오늘도 시끄럽다. 내부 게시판에 올린 박 검사의 사표는 현재 반려된 상태. 대검찰의 사표반려 소식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저 인터넷의 성난 여론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깔끔한 모양새'로 배신자를 쳐내고 싶은 마음때문인 것을 국민들이 알기 때문이다. 사표가 수용될 경우, 적극적 행보에 나서게 되면 오히려 대검으로선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고, 반려를 할 경우 내부 조사에 대한 일정 수준의 결과는 내놔야 할 것이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을 예정이다. 그 균형이란게 별게 없다. 그냥 수순과 결과값이 그럴듯한 모양새만 갖추면 될 것이기에 말이다.
검찰에겐 분명 신의 영역이라 부를 부분이 있는 것 같다. 10월 26일 부정선거에 대한 탐문조사도, 혐의자들을 둘러싼 조사도, 현 정권의 부패상을 조사하는 과정에도 신의 영역은 존재해왔다. 대한민국 검찰의 정신치료를 위해 고른 작품은 사진작가 강석호의 <신의 영역> 연작들이다. 정확한 제목은 그의 사진 속에는 신의 영역이 분명 있다는 걸 확인해준다. 불모지에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신의 힘. 마르고 척박한 땅일수록 나무는 문어의 촉수처럼 깊이 뿌리를 내려, 힘없고 아픈 자들의 수액을 먹으며 자란다. 우리 시대의 젊은 예술가 사진작가 강석호의 시각적 비망록『Hubris Disembodied. 번역하면 '해체된 오만'이란 뜻이다. 오만은 반드시 해체되고 만나는 믿음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정권의 오만 또한 그 과정을 겪을 것이다.
강석호 <고장난 브레이크> 피그먼트 프린트 2011년
고장난 브레이크를 가진 버스, 그 탈주를 위하여
왜 그는 자신의 작품 연작에 이 제목을 달았을까? 지나친 자신감, 자만, 오만을 뜻하는 라틴어 Hubris. 절제없이 무한질주를 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결과값을 표현할 때, 고대인들은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이땅의 사법정의도 이와 같을 터. 검찰을 포함한 사법당국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이제 극에 달했다. 이때 내부자와 외부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다가올 미래권력에 빌붙는 방법과, 기존의 고집을 고수하며 '언제그랬냐는 듯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로 발뺌을 하는 것. 이것 이상 좋은 전략은 없지 싶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되지 못할 것 같다. 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청신한 한 그루의 나무를 내어 줄 이는, 신이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바른 정치적 미감과 흔들리지 않는 도덕성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써야 할 때다. 부박한 생의 의지를 먹여 살리는 신의 손과, 인간의 손이 촉지할 때, 정녕 '신의 영역'은 확장될터이니. 두려워말라. 간궤와 궤변으로 부당한 힘의 달콤함을 맛본 이들이여, 이제 저 마른땅으로 뿌리가 잘린 채 심기워질때가 올테니. 고장난 브레이크를 가진 버스 위에서 지금껏 자신의 속도감을 즐기며 아래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자들아. 이제 그 끝이 보인다. 그들이 만든 인위적인 신의 영역, 그 하찮은 땅에서 스스로 탈영토화를 꿈꾼 박은정 검사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낸다.
강석호 <고장난 브레이크> 피그먼트 프린트 2011년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나경원 의원은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근거란 찾아볼 수 없는 해명만 늘어놓는다. "여성의원에 대한 성추행"이란 해명인데, 어디에도 전화를 걸었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해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의 언어를 말하는자, 그 주체가 있음을 표현하는게 '주어'란 문법의 기능이거늘, 항상 주어없이 이야기하는 유령같은 이의 언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지겹다. 이제는 아예 목적어도 없는 문장을 늘어놓는다. 내가 ( )을 했다 라는 기본문형조차도 파괴한다. 무엇을에 해당하는 걸 제발 속 시원하게 밝혀줬으면 좋겠다. 나경원 의원의 남편 김재호 판사의 기소청탁 관여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시위 재판에 관여한 것보다 위험수위가 높다는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다시 말해 법관윤리강력 위반이나 징계사유인 셈인데, 이 부분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는 다르다. 그저 법복을 벗고 변호사 활동을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로 무장한 검찰. 참고 드러내지 않으니 계속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믿는 모양이다. 이번엔 제발 대안이 될 만한 사례를 만드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 나경원 의원의 남편, 김재호 판사의 기소청탁건은 마치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후첩들이 왕의 침실에서 자신의 정적을 죽여달라 청원하는 Pillow Petition(배겟송사)와 다를게 없다. 남성이 절대권력을 쥐던 시대, 여성들이 자신의 영역확장을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힘의 행사가 이 침대의 정치학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오죽하면 세익스피어도 작품 속에서 Bed Politics(침실의 정치학)란 표현을 꽤 능구렁이처럼 사용하지 않았던가. 김재호 판사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사랑이 소중한 것은 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이 땅의 사법정의는 매일 콜레라에 걸린 듯 열병에 시달린다. 법을 수호해야 할 자들이, 법에 대한 지식을 악용하고 갖은 오만을 부렸으니, 이제 그 사랑에도 종결의 시간이 다가올 듯 싶다. 마치 강석호의 사진 속 파편들처럼, 이카루스라고 착각한 자, 그 날개가 부러지고 꺽이며 조각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한들 어려울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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