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Fashion/패션과 사회

짝퉁 인문학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읽고 소화하는가

패션 큐레이터 2012. 1. 16. 16:25

 

 

제가 대중미술서의 저자가 되기까지, 영향을 준 분들이 꽤 있습니다. 온통 어려운 단어들을 남발하며 자신의 학력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이들 사이에서, 미술이 얼마나 대중에게 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 이주헌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영국의 변호사인 앤소니 줄리어스입니다. 

그가 쓴 <미술과 우상>을 읽으면서 미술 전공자니 뭐니 하는 식의 구분이 필요 없다는 걸 배웠지요. 그는 고 다이애너 비의 이혼소송과 홀로코스트 당사자 재판을 맡았던 스타 급 변호사입니다. 그는 유태인들 관련 재판을 맡으며, 그들의 삶과 문화적 정체성을 연구했고, 미술작품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밝혀낸 최고의 미술사가 이기도 합니다.

최근 컬럼비아 대학의 학부생 과정들을 보며 미술사와 인류학, 물리학과 미적분학이 왜 모든 학생들이 무조건 들어야 하는 과목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미술사는 단순하게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언어의 역사를 다룹니다. 사물과 사건, 역사와 신화를 읽으며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 했던 옛 사람들의 관점을 배우는 것이고, 인류학은 모든 것들의 시원을 다룹니다. 물리학은 자연의 이치를, 미적분학은 사물에 접근해가는 두 개의 커다란 철학을 알려주죠.

의학을 하던 공학을 하던, 혹은 경영학을 하던 이런 관점은 중요합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실제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려면 미술사는 필수적입니다. 인류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만큼 최근 들어 통섭을 운운하지만, 사실상 학문상의 경계란 것도 우리가 너무 임의적으로 구분해놓은 것이 많고, 어찌 보면 각 분과의 담론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밥줄로 이용하려는 자들의 욕망은 아니었나 생각도 해봅니다. 

미술사를 가르치면 어디에서 가르치는 교수님이냐고 묻는 교양부재의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Visiting Scholar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는 객원교수 혹은 객원연구원이라고 잘 소개하죠. 그냥 말 그대로 풀어 쓰면 방문중인 학자일 뿐입니다. 중세 말부터 시작된 대학 교육기관의 관습이죠. 그런데 한국은 유독 이 방문학자가 꼭 교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방문해서 다른 자료들과 문화를 접촉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히려는 연구자일 가능성을 애초 배제하지요. 우리는 늘 누구에겐가 인문학도 자연과학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만 있지, 자기 자신이 학문의 길이 되고, 자신이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모든 것들을 이론화 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틀은 이미 세상에 다 나와있건만, 누군가가 만드는 것을 섭취하는데만 익숙하죠.  

 

제가 앤소니 줄리어스를 좋아한 것은 그가 변호사란 직무를 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미술을 통해 더욱 넓히고, 그런 관점은 기존의 학교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자들의 관점과 다른 신선함과 실제 적용성을 갖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경계와 경계를 넘는 것. 이런 관점에 박수를 쳐주고, 지식의 세계를 월담 할 때, 오히려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는 건 잘 알면서도, 사실은 밥그릇 싸움하면서 용인하지 않는 웃기지도 않은 대학이란 시스템이 있더라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는 절대로 회사를 관두면 안됩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요. 저는 모든 이들이 미술사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 중의 하나입니다. 

적어도 미술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캐묻기는 어렵겠지만 자신의 영역을 미술이란 시각언어를 통해 보는 일은 가능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되면 자칭 이 땅에서 이론화 작업으로 밥을 먹고 사는, 결국 남의 지식을 수입해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정확하게 안다’ 라고 떠드는 자들의 코를 한방 날릴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들의 작업도 더욱 정교해질 겁니다. 그래도 전문가 티는 내야 하니까요.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모든 지식이 SNS로 퍼지는 세상에서 특정 학교에 적을 둔 교수란 존재감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갑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인문학을 무장하고, SNS 상에 포럼을 만들고 나누는 그들의 지식이 더 살아있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사실 대학의 기능과 역할, 혹은 존재론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도 조금은 더 바뀌겠지요.

 

말끝마다 학력자본이 우선권을 주는 사회인양 말하지만, 그 학력의 가면이 벗겨지는 날 실제 실력의 검증이 이뤄지고, 이런 검증이 잦을 수록 학교의 그림자에 숨는 일도 쉽지 않을 터이기에. 우리 모두, 인문학의 시대라 불리는 이때, 우리 스스로 인문학자가 되길 소망하면 어떨까요? 작금의 서점가를 강타하는 인문학은 유독 철학의 영역에 머물거나, 혹은 시간이 없어 고전을 읽을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다이제스트판 지식을 주는 걸 인문학으로 포장합니다. 프랑스발 수입산 철학이 이 땅의 산재한 문제들을 읽어내는 렌즈로 포장되고, 모든 악취를 원천봉쇄하는 향수로 변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서구의 시선으로 구성된 인문학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규정에 우리를 맞추는 일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서구이론을 통한 삶 전반의 환유는 위험하지요. 이런 삶의 얄팍함을 벗어버리는 여러분이 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