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삶의 불편한 진실을 이기는 법-영화 '르 아브르'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1. 18. 23:39

 

 

 

불편한 진실을 응시하는 따스한 시선

 

이번에도 늦은 리뷰를 쓴다. 시사회를 통해 영화 <르 아브르>를 봤다. 극장에 가서 두 번이나 다시 봤다. 영화사 찬란에서 수입한 작품이다. 찬란의 대표와는 함께 식사를 하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회학을 공부한 그녀는 진정성있는 영화 텍스트에 관심이 많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패션 다큐멘터리도 수입해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했다.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예전 문화학교 서울에서 꽤나 진지하게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소화하던 시절 알게된 이다. 핀란드 출신의 감독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성냥공장 소녀><과거가 없는 남자> 등의 작품으로 국내 시네필들에게도 두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항상 하류인생에 관심이 많다. 하류란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오해없기 바란다. 일본의 한 사회학자가 한국의 88만원 세대의 전조가 된 일본의 청년들을 가리켜, 지적하며 만들어낸 용어다. 다만 가난과 사회적 소외란 주제와 맞물리며,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사회적 풍경들이 우리에게 생경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이번 르 아브르는 감독 특유의 연출답게,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정서를 발산한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동선, 감정의 리액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연기는 마치 액자 속 또 다른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영화 속 현실에 마냥 매몰되지 말고 정서적인 거리를,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보라는 감독의 의지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를 배경으로 구두닦이 마르셀과 엄흑인소년 이드리사, 그리고 마을 경감 모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따스한 서스펜스도 매력있다. 감독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는 프랑스를 비롯, 전 유럽의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불법난민 문제를 들여다보는, 소품같은 도시로 르 아브르를 선택했다. 르 아브르는 인상주의를 태동시킨 모네의 첫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둡고 습하며, 황량할 수 있는 항구도시를 차갑지 않은 촉감으로 영상 위에 배접한다.

 

 

불법난민으로 들어온 아이를 감추어주고 이를 쫒는 경감과, 마르셀을 도와 흑인소년을 탈출시키는 동네 주민들의 정겹고 따스한, 능청스런 감정의 연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경감의 이름이 모네다. 사물과 빛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던 인상주의의 대가 모네 말이다. 바로 기성의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한 일련의 작가군들이 빛의 효과에 눈을 돌리며 오늘날 서양미술사의 탄탄한 레전드가 된 사조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사물의 표면에 접하는 빛의 효과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이고, 그 명멸의 순간에서 변화란 단어를 생의 진실로 받아들인 다는 태도가 들어있다. 사회적 사안과 이를 둘러싼 시선도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 견고해지거나 혹은 해빙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관점을 심도깊게 들이댄다.

 

영화 속 마르셀은 언뜻 들으면 꼭 막스처럼 들린다. 실제로 동네 주민들은 그를 막스로 부른다. 바로 마르크스다. 북유럽의 정서는 여전히 그들의 생산체계와 삶의 태도에서 사민주의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북유럽의 복지국가란 이미지를 명확하게 심어주었다. 마르셀은 마치 마르크스의 현신처럼, 불법난민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보여야 하는지 보여준다. 단 설교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정제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영화의 매력이리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원화란 단어를 들먹이고, 다양성을 포용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이런 철학이 일상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현현할 때, 그들은 여지없이 옷깃을 여민다. 불편한 진실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오늘이 용산참사 3주기다. 아직도 기억난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던 시절, 갑자기 방송국 가는 길에 차들이 즐비하게 막혀, 끝내 펑크를 내고 말았던 그날, 바로 그날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재개발을 둘러싼 권력의 폭력이 이 땅을 뒤덮었다. 세월이 흐른다고 지워질것인가? 툭하면 화해와 용서를 내뱉는 자들은 가해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속죄'를 원할 뿐이다. 따끔한 응시가 필요하다. 적어도 이 나라에선. 소외되고 잊혀진 자들을 바로 지금 우리의 지점으로 복원해내는 작업.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배웠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