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레즈비언의 사랑은 다르지 않다-영화 '창피해'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1. 14. 16:54

 

 

환절기다.....몸이 아프다

 

유독 1월이 되면 영화가 끌린다. 마치 다 읽지 못한 두툼한 책을  읽어내려고 불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눙치는 표정의 남자처럼. 새로산 빔 프로젝터를 이용, 거대한 벽면에 투영된 이미지와 이야기를 읽어 나간다. 김수현 감독의 <창피해>를 고른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감독의 전작을 본 적도 없고, 출연하는 배우 김꽃비와 김효진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물론 영화 이후 두 배우에 대한 인상은 딱히 바뀔 것 없어 보인다. 예술영화를 빙자해 '지금껏 해온 작품과는 다른 호흡'을 배우고 싶었다면 그리 말릴 입장은 아니겠지만, 결과값은 딱할 지경이다. 흥행을 기준으로 배우를 평하는 건 아니다. 드라마 선정에서 부터 캐릭터를 소화하는 문제까지, 그녀들의 몫에서 '배우'를 평해보는 일일 뿐이다.

 

 

CJ가 모든 영화배급권을 잡고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에서, 그래도 독립적인 예술영화에 도전하는 건 쉽지 않다. 아니 모험에 가깝다. 영화가 진부한 컨벤션에 빠지지 않도록 일종의 항독작용을 하는 것이 인디의 존립근거다. 그런 점에서 왠만하면 독립영화/예술영화들에 박수를 쳐주고 칭찬해주고 그랬다. 그러나 여기에도 원칙은 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은유를 끌어다 파편화시킨 영상을 입히면 예술영화가 된다고 착각하는 작품에는 칭찬하지 못하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백화점에서 감정노동자로 살아가는 윤지우(김효진 분)가 자살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마네킨을 사용하는 부분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설정이었다. 1920년대 초현실주의 영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오브제인 마네킨의 재등장을 보는 내 시선은 꽹하기 짝이없다.

 

 

 이 영화는 여자들의 사랑을 다룬다. 처음에 약간의 기대도 해봤다. 여자들의 사랑, 레즈니어니즘을 다루는 시선이 한번쯤 사회적 묵상을 위해서도 필요한 시점이 아니던가?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비롯 다양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나온 다는 건 그만큼 사회의 견고한 외피가 조금씩 균열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기대도 했다. 하지만 감독은 진부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물의 이미지를 남발하고, 심연에 잠긴 여자의 몸만 찍고 있다. 한마디로 성 정체성이 규정되기 전 아이의 이미지만 줄창 투사한다.

 

듣기에도 거북한 성우 출신 배우의 발연기도 한 몫 했다. 영화 속 연기자들을 보면 그들의 욕망이 보인다. '저 친구 저런 역을 한번 해보고 싶었군' 하는 한탄을 늘어놓게 하는 씬들. 이런 장면을 만날 때마다 영화 공간을 디자인하는 감독의 무능함이 보여 불편하다. 자칭 미대교수 역을 맡은 김상현의 연기에서 요즘 뜨는 개그우먼 '아메리카노'의 안영미가 떠올랐다. 그녀의 대사가 머리를 치고 간다. '아이야.....너 여...은기 어데서 배웠니 아이야......' 연기자가 연기보다 개그를 선택할 때, 관객들은 서글프다.

 

 

관객을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

 

레즈니어니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사회에서, 감독이 만들어낸 꽤나 난삽한 영화적 텍스트는 쉽게 이해되지도, 그렇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데도 철저하게 실패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 아무리 육중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던, 혹은 내밀한 우리들의 욕망을 담건, 이야기의 견고한 힘이다. 너무 많은 걸 양념으로 쳐바르면,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되어 버려지기 십상인데, 이 땅의 감독들은 유독 '예술영화'란 외피의 갑옷을 입고 이런 실수를 자주한다. 레오까락스를 너무 좋아했나? 영화 화면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진부한 베끼기의 흔적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응시하려는 내 마음을 막아서 호흡이 거칠어졌다. 책임져라.

 

옷을 만들던 영화를 만들던, 잘하는 인간들에겐 약간의 특징이 있는데 그건 과도하게 힘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영화를 만든다고 떠드는 친구 중에는 자신이 '호흡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친구들이 있고, 이들이 만든 영화는 자신도 모를 그 과도함이 장면 곳곳에 박혀서, 관객들을 슬프게 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영화제가 끝날 때마다 들려오는 여성 관객들의 진부한(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극복하지 못한) 논평들을 되세긴다. 잘 만들어진 여성영화가 한 편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 혹은 여성을 위한 에로틱한 영화들, 시선의 법칙을 여성을 주체로 놓은 영화들을 한번 쯤은 보고 싶다는 말 말이다.

 

 

겨울 바람, 한기 버텨내며 만든 한 편의 영화를 위해, 그 노력에 박수를 치기보다 왠지 모를 심술을 부리게 되는 건 결국 영화의 완성미가 주는 불쾌감 때문일 거다. 더 화나는 건 이런 영화가 흥행하지 못할 때, 툭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내 놓는 '아직 한국사회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주기엔 익숙치' 않다라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을 때다. 아니다. 영화를 잘 만들면 관객들은 박수친다. 더 나아가 변화까지 모색한다. 영화가 가진 현실을 변주하는 능력, 아니 그 현실을 넘어 새로운 것들을 껴안아 낼 수 있는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자, 진정한 영화의 힘을 아는 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