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Holic/영화에 홀리다

삶은 항상 도가니다-영화 '도가니'에 대한 때늦은 리뷰

패션 큐레이터 2012. 1. 16. 11:37

 

 

광풍이 분다, 옷깃을 여미어야 겠다

 

연말이 되면 항상 최루성 드라마들이 등장한다. 한 해를 정리하는 정서의 미감을 눈물에 둔 탓일까? 한랭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은 온통 다습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글이 늦었다. 영화 <도가니>에 대한 뒤늦은 리뷰를 올린다. 작가 공지영의 온라인 공습,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 세상에 미친 그 영향은 지대했다. 도가니법을 만들고 관련자들을 뒤늦게 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학교는 폐쇄되었다. 법이란 합리적 이성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사안을 영화의 힘이 이뤄냈다. 한편으로는 상처받은 이들에겐 위로가 되겠지만 이렇게 예술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우리 안에 숨겨진 공범의식을 끌어낼 수 있는 닫혀버린 이 사회가 밉상이다. 한국사회가 영화 한편의 파급효과를 둘러싸고 허울뿐인 공론화 과정에 들어갈 때도,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언론들은 작가의 개인사를 캐거나, 어린 연기자들이 입게 될 트라우마를 들먹일 뿐, 영화 텍스트의 중심이 된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개정'되지 않은 것이다. 도가니의 경우는 그저 운 나쁘게 걸린 재수없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사각지대란 표현을 쓴다. 그 곳은 빛이 관통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며, 그 지대 위를 걷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쓴다. 영화 속 배경인 무진처럼, 짙은 농무의 세계 속, 아이들의 울부짖음은 '짐승의 시간' 속에서 주변과 통어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아닌 기득권자와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이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일을 목도할 때마다, 인간 속에 내재된 심리를 본다. '집단범죄는 어느 누구의 범죄도 아니라'란 정서. 흔히'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눈을 질끈 감는다는 이들. 그리고 여기에 부여되는 '삶은 그래도 지속된다'라는 웃기지도 않은 노년의 지혜를 빙자한 말들. 이것이야 말로 이 땅의 조직범죄를 양성화한 은폐막이 아닐까? 마치 위기마다 견고한 자신의 껍질 속에 웅크리는 달팽이처럼. 하지만 되집어보면 이 공범의식만큼 서로를 견고하게 묶어주는 확실한 끈도 없다.

 

그러나 영화 도가니는 새로운 공범의식을 우리에게 만들어주었다. 결국 저런 세계를 만드는데 우리 또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일조했구나란 생각. 결국 그 껍질을 깨뜨리고 빛의 세계로 나와야 겠다는 마음. 영화 도가니는 우리 안의 은폐막을 거둬내는 은빛 탄환이 되었다. 물론 일회성 탄환이지만, 이런 비슷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사회적인 치리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값을 만들어낸 듯 하다. 글의 힘이고 영화의 힘이다. 하긴 1억 피부녀의 서울시장 입성 실패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여론몰이까지 해준 건 덤일거고. 어찌보면 국회의원 나경원의 배경이 도가니의 배경인 '범죄집단으로서의 사학재단'이란 점도 무시하지 못했을거다.


 

요즘 부쩍 장애인에 대한 성폭행 사건들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걸 본다. 간단한 이치다. 그만큼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약자들을 골라 자신의 성욕을 풀고, 걸릴 경우 모든 걸 피해자에게 돌려 버릴 수 있는 잔머리를 굴린다는 이야기다. 가해자들은 결코 우발적인 범죄자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법의 심판을, 그 실루엣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악용하는 이들이다.

 

영화 도가니는 우리가 애써 눈감아왔던 우리 자신의 공범의식을 일깨웠다. 법에 대한 부조리, 가진 자들의 횡포, 전관예우의 문제 다 좋다. 이런 시스템적인 문제들은 오랜 교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유독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악화일로를 걸었던 법의 논리도 조금씩은 나아지길 기대하는 수 밖에. 왜 이렇게 나약하고 수동적인 문장을 쓰냐면, 그만큼 이 땅의  법 체계가 하루 이틀의 싸움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길 때문일거다. 현실적인 상처에 질린 탓이다. 이따위 체계를 점진적으로 고친다는 말은 실은 '내부적인 혁명'을 포기한다는 말이고 결코 교정될 수 없는 운명의 이중성을 뜻하기 때문이리라.

 

법은 개인의 차원과 조직의 차원,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회 전체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다. 현 정권의 법적 판결내용들을 통계로 내보면 알게 될 것 같다. 연극학자 조엘 쉐크너가 쓴 <어릿광대의 정치학>에 보면 당대의 기득권자들에게 항의하다 죽어간 민중연극의 연기자와 연출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돼지같은 권력자들의 욕망을 비꼬기 위해 실제 연극에 돼지를 출연시킨 두로프란 광대도 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 광대란 권력자를 위한 광대가 아닌, 민중을 위한 광대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연극의 장은 상황을 민주화하여,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이들에게 '권력의 우스꽝스러움'을 대면케한다.

 

영화 포스터 속 한 줄의 태그라인이 나를 사로잡는다. 민주화의 도시 무진에서 일어난 이야기. 민주화란 얼마나 웃기는 것인가? 그걸을 말로 늘어놓는 자들은 정작 저 차가운 대지에서 굴렀던 자들이 아니라, 선술집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추회하는 자들의 얼굴일 뿐. 나는 민주화 세대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자신들만이 변화의 노정에서 주체였다고 착각하는 자들. 이런 자들이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타인들의 슬픔을 빚어내는 자들. 이들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는 "너희가 그 도가니 속에 들어갈 시간이라고" 더 아이러니한건 영화 <도가니>의 투자자에 종편방송사 MBN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일거다.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윤리적 소비를 권장하는 나로서는 '보지말자'라고 말해야지 싶다. 종편개국방송때 축하 메시지를 던진 김연아와 인순이를 향해 '거부' 표시를 한 작가 공지영은 여기에 대해서 몇 마디라도 해줬으면 하는데, "자신이 종편방송 신문사에 글을 기고할때와 지금은 맥락이 다르다" 궤변을 늘어놓는 이런 이들이, 바로 선술집에서 늘어놓는 허울좋은 무용담의 시간만 긴 자들이 아닐까 싶다.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판사를 향해 석궁을 겨눈 걸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의 배후와, 사법 체계의 허울이 이번 영화를 통해 벗겨지길 바람한다. 석궁판사가 정봉주 의원에게 판결을 내린 그 판사라니, 결과값이 궁금할터. 뭐가 그리도 캥기는게 많아서 언론사들의 전화인터뷰를 거절하는지. 검찰이나 사법부나 그 밥의 그 반찬인 세상. 이런 자들과 도가니 속에서 비빔밥이 되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