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작품을 보는 시간은 항상 즐겁습니다.
디자인의 원칙을 배우는 도상에 선 이들의 손 끝에서, 그나마
기성의 틀에 물들지 않고 맘껏 자신의 생각들을 풀어내려고 고물거리는 그
손끝에 어린, 생각과 사념들, 무엇보다 순수의 움직임을 사랑합니다.
뉴욕 출국 전 부랴부랴 서둘러 보았던
에스모드 서울 학생들의 한국전통문화 패션 전시회
<멋, 짓다>전에 대해 늦은 리뷰를 남깁니다. 사실 패션 인큐베이터
란을 괜히 만든 것이 아닙니다. 신인 인디 디자이너들을 발굴해서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이 과정에서 기업과
연계할 수 있는 탤런트를 찾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지요.
에스모드 서울 2학년 학생 100명 중 1차 교내 심사를 통과한 78명이
제작한 총 100여 개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예술작품과 건축물, 한국의 놀이문화
복식사 등 전통문화에 학생들 특유의 감성을 접목시킨 의상뿐만 아니라 보자기, 자수, 매듭 등
규방 공예품에서 사용된 테크닉을 활용한 다채로운 패션 액세서리 작품도 보이더군요.
다양한 전통매듭과 바구니짜기 기법을 사용해 만든 고아라 양의 원피스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기하문과 현대적 건축 뼈대에서 영감을 받은 절개선 안에 굵기와
넓이가 다른 여섯 종류의 끈을 짜 넣고 여기에 전통 오브제에서 많이 쓰이는 브라운과 블루 컬러로
끈을 염색해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실루엣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구니에서 느껴지는 원형의
모티브를 지속적으로 살려, 스커트의 볼륨감을 나타내는 요소로 형상화 했고
같은 소재의 끈을 발목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돌려 싸 전통 보호대인
각반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최정심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은 "보통 사람이 집을 그릴 땐
지붕부터 그리지만, 집을 직접 지어본 목수는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으로 그린다. 관념만 가진 사람과 경험해본 사람이 다른 것처럼 전통문화를 주제로 직접 손 끝으로
작품을 만들어본 여러분들은 분명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 한국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되리라 생각한다"
고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심사위원으로 많은 분들이 위촉되셨는데, 이 중 제게도 가장 와 닿는
구체적인 충고의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통의 현대화란 캐캐묵은 화두를 실제 디자인을
통해 풀어가는 일은 결코 수사학적인 접근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갑옷에 쓰이는 가죽과 고가구의 쇠붙이 장식을 이용해 만든 슈즈입니다.
가죽에 구멍을 뚫어 얇은 금속판 장식물을 솔트로 연결해 부착했고 가구 다리로 쓰이는
황동 주물을 톱으로 잘라 매끈하게 다듬은 후 구두 굽으로 변형시켰는데요. 공격적인 스파이크 슈즈의
느낌을 주기 위해 볼트와 너트를 앞축에 돌려 박아 앞과 뒤의 굽높이를 조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해 고가구의 녹슨 효과를 더했다. 개인적으로 알렉산더 맥퀸의 킬힐과
비교될 만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형태상 비슷한 실루엣을 갖긴 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형상과 기법을 이용하니, 고색창연함과 새로운 모던함이란 양가적
가치를 동시에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점수를 줬습니다.
개인적으로 레이디 가가의 독특한 의상으로 입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 또한 조선 무사의 갑옷에서
인스퍼레이션을 얻었습니다. 최근 북유럽의 디자이너들이 전통 펜싱복의 보호대와
형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작품들이 선보이더니, 그만큼 우리의 무사 복식은 강건함과
의외의 화려함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서스펜더, 스커트, 볼레로, 슈즈의 네가지 아이템을 제작해서
통일성 있게 선보였는데요. 여성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스킨 톤의 소가죽을 메인 소재로 사용,
여기에 양털을 매치해 철갑 무사복 위에 동물의 털을 얹은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한국 전통 가방 장식과 가구에서 보이는 경첩을 디테일로 사용한 것이
포인트입니다. 가방 장식을 연결하면 원피스로도 입을 수 있죠.
에스모드 서울 최우수상은 개마무사의 갑옷에서 영감을 받아
인조가죽과 퍼를 소재로베스트와 백, 슈즈 컬렉션을 제작한 김재우 학생에게
돌아갔습니다. 블랙 인조가죽에 금색 안료를 발라서 빛에 따라 반사되는 황동 갑옷의 효과를 주었고
베스트 전체에 십자로 절개를 내어 안쪽에 댄 인조 퍼가 빠져 나와 보이게 해 웅장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무사복의
느낌입니다 부채꼴 모양의 견장과 앞 여밈단에 철제 징 장식을 박고 인조가죽을 얇게 잘라 소매끝과
앞단에 부착해 입체감을 주었는데요. 남성적인 실루엣을 가진 무사복식을 여성복식으로
전환하는 사고의 방식이 아주 멋집니다. 특히 옷에 쓰인 소재개발 아이디어와
모피 그대로 가방과 부츠에까지 사용해 일관된 컬렉션을 완성했는데요.
2012년 S/S에서 한국의 단청을 이용해 컬렉션을 준비해보였던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한 점을 골라 상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보릿대로 만들어보았던 여치집에서 보이는 곡선과 직선의 형태를 차용한 원피스입니다. 이상봉
선생님의 심사기준이랄까, 예전부터 지켜봐온 바로는 항상 형태감의 구현에 많은 점수를 주시더라구요.
데님을 끈으로 만들어 직선적인 느낌을 표현한 부분도 신선했고, 여치집의 꺾인 모서리 부분은
매듭으로 만들어 아래쪽에서 연결함으로써 둥근 볼륨을 형상화했습니다. 틀을
나선형으로 제작해 꼬인듯한 여치집의 실루엣을 표현했습니다.
최근 코리언 쉬크에 대한 작은 아티클을 쓰고 있던 참이라
이런 전시는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실험정신이
계속 그 칼을 벼리되, 깊어져서 우리가 이제껏 스스로 전통이란 벽을 만들고
그 속에 갖히며, 한정지었던 것들의 울타리를 넘어가길 바랍니다. 결국 전통성이 세계를
향해 그 매력을 발산하려면, 결국 보편성이란 무늬를 입어야 할테니까요. 이 다음
세대에게 이 멋진 화두를 다시 한번 물려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진 제공 : 에스모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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