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열렸던 빅토리안 앤 앨버트 박물관의 전시소개를 이제서야 올리는 건 참 얄궂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수십번 한 터라,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그레이스 캘리를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너무 늙은이같다고 핀잔을 준다. 요즘 여배우들도 동일하게 매력적이지만 이상하리만치, 끌리지 않는다. 예쁜걸로 치면 옛 배우들의 외모가 오히려 더 조각미남같고 조각미녀같다. 어쩜 그리도 콧날이며 눈동자며 오똑오똑한지. |
지나간 추억의 잡지를 꺼내 그녀가 모델로 마지막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내놔도 그녀는 요즘 말로 '여신'이란 수사가 아깝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멋지다. 배우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 그녀가 입었던 옷을 중심으로 헐리우드와 그 전성시절의 미감을 드러내려는 전시회의 의도도 참 좋다. 단순하게 자본과 인공미의 결합 이란 식의 도식적 평가를 넘어, 영화는 제 7의 예술로서 우리 시대의 주요한 예술장르이자, 가장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던가?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 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협업을 하고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작업을 전시로 본다는건 너무나 멋진 일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가능하도록 배우나 패션 양면이 자신의 아카이브를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
어느 시대나 스타일의 아이콘이 있다. 1930년대의 세계대전의 시대를 각인한 상처와 정신의 혼돈을 넘어, 퇴폐적이면서도 양성적인 느낌의 여성상을 만들어냈던 마들렌 디트리히를 비롯, 1940년대 정갈한 지성미를 표정으로 보여준 그레타 가르보, 1950년대 시대의 여신이라는 수사 밖에는 도저히 쓸수 없는 너무나 완벽한 미모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있다. 60년대를 단아하고 우미넘치는 여인의 세기로 만든 오드리 햅번은 또 어떤가? 50년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또 다른 극단에는 유럽풍의 고아미를 토해내는 또 한명의 배우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그레이스 캘리다. |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답게 연기는 항상 신중하고, 깊이있는 캐릭터 분석으로 이어졌다.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다이얼 엠을 돌려라>와 세기의 명작인 <이창>등에서 그녀가 보여준 이음새없는 연기는 지금도 스릴러물의 한 정형을 이루었다. <이창(Rear Window)>에서 입었던 반투명 드레스와 <다이얼 엠을 돌려라>에서 보여준 진홍색 원피스도 선보여서 눈이 부셨다. 어느 시대의 스타일의 아이콘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오늘 동아일보에 나온 한국의 스타일리스트들에 대한 글을 읽었다. 안타깝게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 패션 코디에 불과했던 위치에서 스타산업의 별로서, 트랜드와 역활 분석을 대행한다는 식의 칭찬 기사였지만, 나는 그들이 영화계에서 그들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마뜩치 않게 보는 편이다. 이 나라만큼, 영화 속에서 캐릭터와 드레스가 잘 조화된 작품을 찾기 어려운 나라가 어디에 있나? 정작 있어도 신문에 나온 이들의 작업은 아니었다 |
특정 브랜드 후원 받아서 배우한테 걸치게 하고, 팬덤에 힘입어서, 스타의 반열에 드느니 어쩌느니 한다. 그렇다고 스타일리스트란 작업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분명 시대의 해석자로서 패션이란 기호를 만져야 하는 사람들이 맞다. 단 이 말의 깊이 만큼 표현해 주는 스타일리스트를 만나고 싶다. 이 나라의 문화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기준이고, 드라마 속 패션이 패션의 교과서가 되는 나라다. 1930년대 헐리우드도 그런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도 우리의 지금 모습 중 상당 부분이 겹쳐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배우들만큼은 다르게 살았다. <불멸의 보석 컬렉터들>을 번역하면서 느낀건, 컬렉팅 하나에도 자신의 색과 감성을 담아냈다는 것과 테마로 묶어서 언제든 선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 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시그너쳐다. 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연예인 누구의 친구라고 자랑하듯 나와 이야기 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의 충고는 항상 개인을 몰개인화하는 통론적인 주장이나 나열한다. 스타일을 하나로 묶어서 정형화하려는 작태 부터가, 스타일이란 단어의 의미와 충돌한다. 지배적 양식보다, 다양성이 필요한 시대에, 그들의 충고는 항상 특정 배우의 옷차림만 나열하는 것으로 끝나는 걸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일거다.
그레이스 캘리 전을 보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전시에 대한 생각의 범위를 정말이지 넓혀야 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매체와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느낀다. 한국사회처럼 족적을 기록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선, 우리의 내용을 알리는 전시가 참 어렵다. 국가 기록원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가일층 기울여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언젠가 우리도 '우리의 배우'를 그녀의 옷차림을, 극중 복식을 다룰 수 있겠지......암 이런 날은 꼭 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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